목록

2017년 9월 7일 목요일

책 읽기 : 여자는 아니라구요? Why not women? Loren Cunningham & David Joel Hamilton


이 책은 미션 필드에서 실제로 일하며 전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단체 Youth With A Mission 의 창설자인 저자가 여성 일꾼의 필요성과 은사 부어주심을 절실히 체험하면서 기독교에서의 여자의 리더쉽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공동 저자인 고대 언어에 정통한 해밀턴은 고대 철학과 문학 등에 나타난 고대 서양 문명의 여성 비하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두 저자 모두 남성분인데 성경의 여성관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먼저 커닝햄 목사님의 저술 부분을 보면,

1.여성비하는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우월감, 프라이드로 인함인데 인간의 프라이드는 기독교 교리상 죄의 본성이 아닌가? 여성비하의 생각들은 남자를 진정한 크리스챤으로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남자에게도 무척이나 해로운 생각인 것이다.




2.과연 예수님은 여자를 비하하였고 사역에서 제외 시켰는가?
예수님은 여자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세례는 요한에 의해 받았지만 기름 부음은 두 여인의 향유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고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은 여자들이었다. 즉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의 중요 사역게 여자들이 동참하였다.

3.사역 현장에서 여성 리더들의 활약이 사역 초기에 왕성하게 불을 일으키게 하는데 크게 공한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남자들이 조직의 리더가 되고 여자들은 물러나게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성경의 특정 구절로 여자들의 리더쉽을 부인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나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스르고 왕성한 사역의 확장을 방해하게 한다.

4.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와 특정 장소, 상황, 시간에 의해 상대적인 내용이 있는데 이 둘을 잘 구별해야하며 성경 말씀은 또 다른 성경 말씀을 레퍼런스로 삼아 이해해야한다.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리버럴리즘의 오류에 빠지고 상대적인 내용을 절대적으로 이해하면 리갈리즘의 오류에 빠진다. 여자여 잠잠하라와 같은 성경구절은 상대적인 내용으로 그 시대 상황과 배경을 함께 살피며 이해해야한다. (그 설명은 바울은 성차별주의자인가 라는 내용에 쓴 것과 등일하다.)

5. 하나님께서 필요와 그의 사역 디자인에 따라 부어주시는 은사, 기프트는 여자들에게도 부어졌고 리더로 세우셨다. 성경에서 살펴보면 구약에서는 드보라가 있다.미리암은 모세, 아론과 더불어 출애굽의 리더였다.신약에서는 더 많은 여성 리더들이 있다. 교회의 일꾼 뵈뵈는 리더였고 챔피언이었으며 유니아는 사도였다.브르스길라와 아굴라에서 예외적으로 여자인 브리스길라를 아굴라 앞에 기록하였다. 안나와 필립의 네명의 딸은 선지자였다. 이외에도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현대 교회는 세계적으로 2/3가 여성 성도이며 이들에게 여성 리더들의 활약이 요구되어 있고 사역 현장에서 실제로 여성의 리더쉽을 세우는 왕성한 기름부으심이 있다.

6. 왜 제자로 부른 12사도는 모두 남자였는가는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당시의 시대상황의 제약 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예수님은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 오셨는데 노예를 폐지하지 않은 것처럼 갑자기 이 세상을 이상 사회로 바꾸고 변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3년간의 예수님의 사역에 집중하시고 그 당시 사회가 갖고 있던 관습들을 거스르지 않으시며 사역하셨다. 여자의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던 당시 상황 속에서 12사도를 남자로만 부르셧지만 여러 사역 현장에는 여성들이 항상 함께 했다.

7.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는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여자들이 말하는 것들이 성경 구절로 쓰여졌고 그것을 남자들이 읽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쳐질 수 없는 성경구절이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를 가르쳤고 예언의 말씀이 여자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전해졌다. 바울은 39명의 동역자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1/4 이상이 여자였다.

해밀턴에 의한 고대 연구는 성경의 시대적 배경을 다루면서 좀더 역사적, 문화적, 학술적인 접근을 한다. 

1. 그리이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등 여러 고대의 문학작품에는 여자가 악의 근원이 되며 열등한 문제 덩어리로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남자의 소유물이나 파워 플레이에서의 승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묘사된다. 제우스는 헤라를 때렸고 모욕했고 끊임없이 바람을 폈다.

2. 소크라테스-플라토-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제왕의 스승이었으므로 이들의 철학이 서양 사회 전역에 퍼지는 데 공헌을 했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를 열등하며 겁장이이고 정직하지 않다고 했다.

3.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은 공공 창녀촌을 합법화 하는 법을 만들고 장려하였고 가정 생활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고 그리이스 시대의 남자들은 짐나지움에서 토론하고 자유롭게 활동했지만 여자들은 문밖 출입을 못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였다.

4. 여자들은 노예와 다를 것이 없었는데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고 비즈니스를 경영하지 못했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

5. 로마시대에도 여권은 낮았다. 여자들은 고유의 이름 없이 패밀리이름의 변형으로 이름지어졌으며 가족신인 불씨를 보존하는 일을 맡았지만 결혼하면 남편의 신을 모셔야했다. 남편은 간통한 아내를 죽일 수 있었고 술에 취하면 간통의 위험이 늘어나므로 술에 취하여도 죽일 수 있었다. 키스로 인사하는 유래가 술 냄새를 맡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원하지 않은 신생아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는데  남자아이를 버리는 것은 법으로 금했으나 첫여자아이를 제외하고는 여자아이를 버리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시대의 무덤을 보면 남자 성인의 수가 여자 성인의 수보다 2배로 많다. 여자는 성인이 될때까지 살지를 못한 것이다. 이러한 세대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 시대까지도 이 법은 유효했다.

6. 로마시대의 여자들은 노예와 가축들과 다를바 없는 소유물로 취급 받았다. 소수 엘리트 여자들의 예외가 있고 전쟁에 나가 죽은 남자들때문에 가사경영을 운영해야하는 경우등이 있기는 하였으나 소수였고 실용주의였던 로마인들에게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바텀라인 생각은 여자를 존중하는 생각이 없었다.

7. 그리이스 로마 신화의 배신과 전쟁과 여신에 대한 악의등이 얼룩진거에 비하면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는 이브는 아담에게 아름다운 선물로, 파트너로, 친구로 지어졌다. 하나님이 그의 이미지로 만든 출생이 같고 , 운명과 비극과 희망이 같이 나눠지는 존재였다. (shared origin, desitiny,tragedy, hope) 얼마나 여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지 혁신적이다.

8. 돕는자, 핼퍼는 원어의 의미가 수학 선생님이 학생을 도울 때 쓰는 그 핼프와 같은 단어이고 서번트가 아니다. 아담이 리더이고 이브가 돕는자라는 상하위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원어는 시편에서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자 라고 할 때의 그 핼퍼와 같은 단어이다. 그 옆에 동등함을 뜻하는 수식어가 함께 있다. 영어로는  a help corresponding to him....equal and adequate to himself . 따라서 Woman was created not to serve Adam, but to serve with Adam.

9. 고대 문화로 여자는 결혼과 더불어 집을 떠나오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라고 말한다. 여자의 가치가 남자의 소유물의 일부가 아니라 남자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함께할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는 가히 혁명적이다.

10.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은 남자와 여자에게 함께 주어졌고 사단의 유혹에 빠지는 죄의 현장에도 you 의 단수형과 복수형이 나눠지는 원어에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아담도 그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희망의 메세지, 여자의 후손은 offspring은 seed와 같은 의미인데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고대의 인식, 여자는 밭이고 남자가 씨다라는 인식, 여자에게서 씨가 나올수 없는 인식과는 전혀 다르다. 

11.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당시의 남성 우위의 문화에 젖어있던 랍비들에 의하여 변절된다.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마리엘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여자는 대체로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보다 죄가 더 많고 남자를 죄짓게 하는 존재로 가르쳐졌다.해롯왕의 성전 시기에는 성전의 구조상 여자들은 예배에서도 소외 되었다. 대부분의 랍비는 여자에게 토라를 가르치지 않았다. (가마리엘은 딸들에게 토라를 가르쳤다.) 여자들은 하나님과 가까와질 기회를 남자들보다 한 스텝 멀리 남자라는 매게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어떤 랍비는 사라가 갱년기를 지나 아이를 임신한 것은 사라가 더이상 여자가 아닌 내부가 남성화 된 시기에 아이를 가진거라는 괴설을 내놓을 만큼 남성 중심 사상이 심화된 유대사회가 되었다.

12. 예수님이 오셨을 때 요람에서 십자가까지 여자들이 함께 하고 지켰는데 예수님의 구원의 메세지가 젠다 바이어스가 아니라 젠다 인크루시브 였기에 이 세상의 불합리와 억압을 절실히 느끼는 여자들에게 더욱 어필한 것은 당연한 결과 였다. 그 당시 여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인격적으로 여자들을 대해주는 사람을 전혀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예수님은 랍비와도 달랐고 선지자와도 달랐음이다. 간음한 여자 앞에서, 무죄한 자는 돌을 던지라했듯이 여자가 더 죄인이고 남자를 유혹에 빠지게 하는 존재라는 더블 스탠다드를 갖지 않고 남녀 모두에게 같은 룰을 적용하셨던 그 예를 생각해보라.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의 남자들과 얼마나 달랐을지를...
이혼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남녀에게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또한 누가복음 13장 16절에 등굽은 여자를 고치시며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시는데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표현만이 있을 뿐이었다.

13. 예수님을 가르키는 'Son of Man' 인자라고 번역되는 그 표현의 원어는 anthropos 는 man 보다는 human이나  person 이라 번역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male 이나  man의 원어는  aner 이다. 

14. 구약의 할례는 남자에게만 주어졌지만 신약의 세례는 남녀 모두에게 주어진다.

15. 그리스 로마의 문학 작품, 탈무드등에서는 여자에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신약에서는 여자들의 활약과 역할에 대하여 엄청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예수님은 여자들에게도 성경의 의미 복음 진리를 가르치셨다. 성전이나 회당이 아닌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전해진 진리는 여자들의 접근성을 제한하지 않았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보라. 예수님이 한 사람과 나눈 가장 긴 대화의 기록이며  그 내용의 깊이는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와도 비교될만하다. 결과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열매가 있었다. 

16. 혈우병 앓는 여인의 힐링 사건에서 불결한 여인이 랍비와 접촉하는 것은 유대법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건만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을 잡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리 중인 여인들을 불결하다 구별짓던 관습에서 해방되어 여자들의 하나님의 백성됨에 참여함을 제한하지 않았다. 

17. 12제자들이 남자인데, 남자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갈리리인이었고 예수님을 3년동안 직접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롯 유다의 배신 이후  그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이 제자의 후보로 올라오는데 두사람, 요셉과 맛디아였다. 그 이후 교회가 성장하자 처음처럼 그  3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으로만 리더를 세울수는 없었고 7명의 deacon이 세워진다. 그런데 동시에 7명의 여성들이 diakoneo (동사) 하였다고 나오는데 그들은
베드로의 장모,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수산나, 마르다 이다. 즉 이들은 남성 집사들과 버금가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 누가 복음 8장 1절에서 3절에는 12제자와 더불어 섬긴 여인들이 언급된다. 최초의 부할의 소식 전달자는 여자였다. 즉 여자들은 복음 사역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19. 누가 복음 11장 27절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라는 군중 속의 한 여자의 외침은 여자들이 아들이나 남편이라는 매게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사상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 더이상 남자라는 메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새로운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개인의 순종임을 나타내준다.

20. 바울은 어떠한가? 철저한 유대식 교육을 받았던 바울이 다메섹 상의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로 진리에 의하여 변화한다. 
당시의 사회의 3가지 코드, 남편과 아내/부모와 자식/주인과 종.
사람들은 이 세가지 코드에 누구나 속하였고 그것은 사회의 지배구조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이 세쌍의 코드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은 자식(35 words)과 종(59)에게 당부하는 말을 부모(16)와 상전(28)에게보다 더 많이 남긴 반면 아내(40)와 남편(150)의 코드에서는 압도적으로 남편에 대한 당부의말이 더 많다. 지배 구조의 낮은 쪽에 더 많은 당부를 하게 되는 패턴이 부부사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자식과 종에게는 부모와 주인에게 obey 하라는 말을 하지만 아내에게는 obay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상호 submission 하라고 한다. 상하관계가 아닌 서로 동등하게 submission 하며 서로에게 순종하는 관계여야한다고 가르친다. 또 다른 사회의 대칭코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다. 유대인 남자는 아침에  침대에서 눈뜨자 마자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종으로 태어나지 않음의 축복에  감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여자나 다 주님안에서 동등하고 자유하다고 한다. 바울은 종이 있는 사회 체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정면 도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진리인 상위 개념을 제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사실앞에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이끌림으로 회개하고 변화하기를 소원하며 가르친 것이다. 그러기에 종의 제도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주인에게도 그 위에 상전이 있음을, 매사에 주님의 도리에 따라야함을 가르친다. 결국 노예제도는 주님의 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또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동등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22. 고린도서의 여성 리더쉽을 살펴보자.
고린도서가 쓰여지던 시대 배경을 보면 그 당시 고린도는 번창하는 항구도시였고 항구도시답게 창녀들이 많았고 아프로디테여신등의 이방 성전이 많았고 성전 종사자들인 창녀의 숫자가 엄청났다. 또 음주가 성행했던 도시였다. 고린도서에 취하지말라는 말이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돕는데 이 부부는 로마와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도왔고 부부의 이름이 같이 성경에 7번이나 언급된다. 그런데 5번 브리스길라가 앞선다. 브리스길라가 아내인데 아내의 이름이 앞서고 아볼로 같은 영향력있는 지도자를 가르쳐서 양성하기도했다. 일설에 의하면 브리스길라가 히브리서를 썼다는 설도 있을만치 가르치는데에 은사가 있는 여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글로에는 고린도전서 1장11절에 보면 하우스교회의 해드, 리더였던 것 같은 해석이 가능하고  바울은 그녀의 평가를 경청했다. 
16장15절에는 스데바나가 언급된다. 그녀의 이끌음을 따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인물 뵈뵈. 그녀는 바울의 추천, 보증을 받았고 바울은 그녀를 보내면서 로마교회에 당부하기를 그녀를 성인(세이트)를 맞이하듯 예의를 갖추어 영접하고 소용되는 것을 공급해주라고한다. 그녀는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23. 바울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하나님을 섬기며 싱글로 살아도 좋다고 한 부분도 획기적이다. 여자의 가치는 결혼과 아이 생산으로 매김되었던 사회였고 하나님의 일에 참예함은 남자에게만 허용되었던 유대 전통 사회와는 너무나 다른 가르침이었다. 결혼의 가치를 폄하한 가르침이 아니라 남녀 공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우선하라는 가르침이다.

24. 여전히 걸리는 문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고린도 전서 11장 3장의 구절은 머리의 원어가 해드라는 뜻 보다는 origin/source 라는 단어가 맞다는 것으로 풀어나간다.  authority/ leadership 으로 해석하면 아래 그림과 같은 위계질서를 설명하는 것인데 


그렇게 보면 서술 순서가 일치하지 않고  소스, 근원의 뜻으로 해석할 때 더 자연스럽다.  그러할때는 다음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고 특별히 The man과 a woman이 단수형 인 것으로 인하여 모든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를 말함임을 알수 있고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으므로 이브의 근원이 아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 순서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고 둘째 아담인 크라이스트를 보내신 그 구조와 맞물린다.


이 부분의 성경 구절은 결론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해야함을, 파트너쉽을 갖고 서로 힘을 모아 하나님을 섬겨야함을 설명한다. 이 부분의 설명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거 같다.

25. 구약의 시대에도 여예언자가 있었다. 사라 미리암 드보라 한나 아비게일 훌다 에스더가 그들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여자들도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였다. 요엘의 예언대로 남종과 여종에게 영을 부어주고 예언하게 하리라는 일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사역을 여자라고 하여 제한하지 않았다. 단지 메너를 가르쳤을 뿐...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는 이미 다른 책에서 나온 부분과 다르지 않다. 그릭, 롬, 유대의 서로 다른 머리 스타일과 풍습의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으면서 문화적인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라는...

26.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구절의 원어를 보면 남자는 여자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인 반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도 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즉 남자 여자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요 특별히 여자는 남자 혼자 만으로는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파트너로 남자와 함께 하여 하나님을 만족시킨 귀한 존재감으로 남자의 영광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자와 남자를 사이드 바이 사이드로 그의 사역으로 부르셨다. 

27. 여자여 잠잠하라는 문장 구조를 설명하면서 방언하는 것, 예언하는 것, 여자 순으로 모두 조용할 것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다. 즉 교회 안에 질서를 세우면서 방언, 예언등 혼란과 무질서가 생기는 부분에 대하여 잠잠히 순서를 지킬것임을 가르치고 또한 그 때 당시 여자들의 교회에서의 활약에 대하여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또한 조용하라한 것이므로 남자든 여자든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는 것들에 대하여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 특별히 여자들이 혼란과 무질서를 일으키게 되었는지는 다른 책에서 설명한 것과 동일하다.
문장 구조 그림은 다음과 같다.



28. 고린도 전서 14장 34절의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는 유일하게 복종의 대상이 빠져있는 문장이다. 그 다음 남편에게 물어라로 인하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로 오해하는데  율법 즉 구약에 의하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잠잠하라는 시편 구절처럼 복종과 잠잠함은 서로 연관이 있는 단어이며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잠잠히 그의 말씀 들음에 집중하고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미니스트리를 하는 여종과 남종 모두에게 적용될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또 여자에게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것은 여자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는 것이다. 묻고 배워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라고....

29. 다음으로 디모데서에 나와있는 구절들이 이어지는데 전서 2장 11절-15절,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라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설명하기 난해한 구절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여자들의 리더쉽과 가르침을 허용하고 독려했던 바울이 돌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구절의 여자는 단수형임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복수의 여인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에베소 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이 횡행했고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박해가 심했던 시기이다. 특별히 이브가 뱀의 거짓에 현혹된 것처럼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있는 한 여인에게 그녀의 가르침을 허용하지 말고 그 거짓에서 벗어나도록 순종하는 자세로 배우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false teacher인 한 여인을 경계한 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의 이름을 쓰면 좋을 터인데 그러지 않고 그냥  a woman 이라고 한 것은 이상하지 않나? 성경책에는 그렇게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이 처음은 아니고 두세군데 더 있다고 한다. 
디모데의 엄마와 할머니는 신실한 여인들이었고 디모데의 신앙이 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여인들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중시한다. 또 바로 앞의 10절에서 여자들의 단정한 옷차림에 대하여 말하면서 professing godliness하는 여자들이라 하는데 profess 는 claim openly 하는 것, 즉 퍼블릭 스피킹을 하는 것, 미니스트리를 하는 것이라고 볼수있다. 즉 사역하는 여자들의 옷차림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 후서 2장 2절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의 사람들은 원어는 males으로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라 persons, human 으로 번역될 젠다인크루시브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즉 바울은 여성의 가르침을 제한하지 않았고 디모데서에서 가르침을 금지한 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한 여인에 한정된 것이었다. 

30. 디모데 전서 3장 11절의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이부분의 원어를 보면 women 이나wives로 둘다 사용되는 고어 단어를 썼는데 NIV의 their wives는 형편없는 번역이라 볼수 있다. their에 해당하는 말이 원어에는 없다. 원어대로 하면 Likewise/In the same way, women/wives are to be worthy of respect,...로 영역할 수 있고 문장의 구조와 다른 구절과의 연관성등을 볼 때  women 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우리말 해석은 '여자들은' 으로 되어있다. 여자들은 으로 해석하면 여자들도 집사로 활약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감 한마디:
이책에서 어떤 부분은 억지 꿰어 맞추기 식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대로 남성 위주의 사회가 최초의 바울의 서술 의도와는 다르게 번역 과정에서 변절 시킨 부분이 있고 그렇게 쓰여진 성경을 아무 의심과 검증없이 받아들였던 것이 우리의 사고를 굳게 하여 원래의 바울의 의도를 검증하며 베일을 벗겨 주어도 그걸 억지 주장이라 여기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교회에서 같은 여자로 부터 여자의 역할을 제한 하는 말들을 너무나 당연히 들어왔기에 그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인 세월이 너무 길어서 그 틀을 또 깨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에서 예수님 오실 당시의 사회의 여성의 지위와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정말 잘 알게 되었다. 오히려 동양권 보다도 더욱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거 같다. 유교의 충효사상은 부모로서  엄마를 존중하는 면이 있다. 또 성적으로 불교 유교 모두 성전에서의 성교가 의식이 될 그런 종교가 아니고 성적으로는 억압하는 면이 컸기에 성적 대상으로만 여성을 보는 시각도 약했던 거 같다. 남자들이 성욕은 훨씬 큰데 그 해소되지 않는 욕망을 여자가 유혹해서라니 하고 여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찌질함이 서양 역사에는 너무나 깊은거 같았다. 여자를 가두고 억압하고... 지금 중동권의 여권의 모습이 결국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문화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그 당시 문화를 이해하고 나니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께서 혁명적이다시피 깨뜨리셨는지를 더욱 감격스럽게 보게 되었고 인간의 문화 속에서 나온 철학과 지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당대의 잘 낫다는 지식인들의 왜곡된 여성관과 대비되면서  은혜와 감격이 있었다. 본 투비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 하늘 나라의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이었기에 그리 행동할 수 있으셨을 거 같다. 
그냥 성경을 읽을 때보다 시대배경을 알고 보니 대비되면서 커다란 예수님의 인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여성인 나를 예수님이 어찌 대우하시고 밸류를 두시나로 이어지니 이 세상이 뭐라하든, 또 어떤 면에서는 여성 억압의 유교 사회의 전통이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뭐라하든간에 예수님이 나를 보는 것,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가치를 매김하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뿐이기에....그런 자유함이 주는 행복감을 이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사회의 제한성 속에 있었던 바울이 다소 여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하여도 그건 그닥 문제되지 않을 거 같은 생각 마저도 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예수님과 동행했던 바울이 예수님과 다르게 여자에 대한 인식을 가졌을리가 없다고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이건 좀 심한 해석인데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도 많았다. 바울은 인간인지라 예수님 같을 수는 없었을 거 같기도하다.
아무튼 이 책은 바울 서신들에 대한 분석에 큰 지면을 할애했지만 나는 예수님을 다시 보며 큰 은혜를 받았다. 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던 중동 지방은 여자들의 암흑시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부 성경 구절을 보고 어쩌면 그것이 당시 스칼라들의 문화적 한계로 번역상의 오류가 반복되며 왜곡된 표현일 수도 있는데 그로 인하여 기독교를 멀리하고, 여성 비하의 종교라 생각하는 현대의 여성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거 같다.
나 또한 성경책을 보며 그 부분이 많이 맘에 걸렸었던 적이 있었기에....
지금 내 마음 속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마음에 새겨진다. 구원에 관한 깊은 얘기를 여인과 나누시는...또 간음한 여인에게 죄있으면 돌을 던지라 하시던 모습도....
이러한 예수님을 바로 이해한 곳에서는 성경이 들어가고 읽혀지면서 여권이 신장하였다. 우리나라도 그런 곳이다. 기독교가 들어와 여성을 가르치는 학교가 세워졌던....
항상 약한 자의 편이 셨던 페미니스트 예수님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