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두사람, 유대인 랍비와 개신교 목사인 핸리를 통하여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화요일에는 모리스와" 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는 이외에도 죽음을 소재로 한 책을 많이 쓴다.
진정한 믿음은 이 세상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이후의 삶에 소망을 두는 것이므로 그런 작가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이 세상의 삶의 가치를 이 새상 안에서만 보게 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것은 내 자손의 기억에 남아있다.
좀 더 업적을 쌓은 사람은 수세대를 넘기며 기억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뿐, 그러다 잊혀지고 존재감이 사라지며 영원한 것은 없다.
믿음을 생각하려면 대단해 보였던 것들이 죽음과 함게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거기서 출발해야함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한 책이다.
랍비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아간다.
작은 소유로 만족하고 주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같이 나누고 율법을 애써 지키며 경건하고 유쾌한 종교 지도자 다운 삶을 살아간다. 가족과 주변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80이 넘은 나이에 죽음을 향해 가면서 랍비는 작가에게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해줄 것을 부탁한다. 유대인 가정에서 종교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회의적이고 시니컬했던 작가. 이 작가의 내면을 깊숙히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도 랍비의 신앙에는 요동함이 없고 마침내는 신앙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회의주의자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 랍비의 모습에서 믿음, 아름다운 삶을 깨끗이 살게 하는 그 세상것을 초월한 믿음, 그 향기를 느낄수 있었다.
그 믿음의 굳건함은 랍비가 학교와 지역사회를 찾아다니며 유대교를 소개하고 다닐 때 있엇던 일화들에서 빛을 발한다. 한번은 학교에갔을 때 어떤 아이가 뿔이 없네하고 놀란다. 미국 사회에 유대인이 들어오던 초창기에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반공 교육 철저했던 우리나라에서 공산당이 머리에 뿔있는 존재인양 생각했던 것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 중심의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녹치 않았고 때론 침 밷음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랍비는 조용하고 친절하게 그 아이의 손을 가져다가 자기 머리에 대게 하고 뿔이 있는지 없는지 만져보라 한다. 모진 학대를 당하고도 버틸 수 있는 힘, 그 마음에 미움과 복수와 오기가 쌓이지 않는 그 힘,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혀 하누카를 학교에서 가르치게 만든 그 힘. 그 조용하고 끈질긴 파워. 믿음의 힘.....
이 랍비는 도시의 서버브에서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지만 그것에 게의치 않으며 사랑하는 아내, 아들, 딸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안정되고 평온하며 거룩하고 존경스런 삶을 살아간다.
반면 핸리는 너무나 다른 삶의 여정을 거친다. 마약으로 쉽게 돈을 벌며 흥청대다 결국 자신도 마약에 중독되어 세상에서 죄짓고 살다가 죽음의 고비에서 만난 예수님. 그 죄인에게 내려진 은혜에 감격하여 목사가 되어 홈리스들을 섬기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교회에서 추위에 떨며 버려진 자들을 섬긴다. 핸리를 젊은 시절부터 사랑했던 신실한 여인과 결혼하여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데 이 가정은 항상 정체 불명의 홈리스들에게 오픈되어 있다. 이 목사에게 유대교적인 율법에 젖어 있는 저자는 한때 범죄자였던 사람의 회개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에게 그 교회의 한 멤버가 범죄자로 벼려진 자신을 어떻게 따뜻이 핸리가 품어 주었는지를 얘기해주고 마침내 저자는 그 의심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또 저자는 핸리에게 묻는다. 이런 선행으로 당신이 지은 죄가 갚아지지 않을까? 하고. 핸리의 단호한 대답. 노.
하나님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깨달은 자로써 살아가는 삶. 어찌 그 은혜를 표현할지...단지 이것밖에는 할게 없어 이렇게 사는 것 뿐이라고, 천국에 가기 위하여 내 죄와 같은 양, 혹은 그 이상의 선행을 해야한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고...
사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은혜의 종교.
무조건적이고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허다한 우리 죄를 덮고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거.
유대교에서 핸리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을까?
힘들거 같다.
이것이 작가가 두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의 공통점을 보여주려 하고 너무나 다른 성격과 인생 역정을 살아왔지만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점들, 평화를 사랑하고 희생적이고 이타적이며 이 세상의 물질이나 소유에 연연해하지 않는 점, 기도에 의존하여 문젤 풀어가는 점등을 보여주려 하였지만 그래도 다른, 두 종교의 너무나 큰 차이점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종교의 힘이라 할지라도 세상 모든 종교가 너가 한 선행만큼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고 하는데 그걸 부정하는 것.
완전한 평등, 똑같은 죄인,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은혜를 깨닫고 나면 더 감격하고 더 완전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기적이 일어나는 종교, 그것이 지은 죄보다 더 많은 양의 선행으로 자신의 죄를 갚는 게 아니라는거. 무조건 적인 은혜의 구원. 그 구원에 대한 감격의 표현일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그 사람이 노예선의 선장이었던 것과 같은 질적인 재탄생. 본 어겐이 일어나는 종교.
이 차이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면 이 저자는 어떤 책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
지금은 이 저자는 자신의 유대교적인 백그라운드를 갖고 아내의 기독교 세계를 넘나들며 두 세계의 종교를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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