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7일 수요일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주제의 설교로 유명하시다. 믿음이 쌓여가는 것을 사람쪽에서의 결단과 노력보다는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끌고 가시는 쪽으로 보고 성경을 해석하시는 것.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이 떠나라하니 믿음으로 순종하여 본토 아비집을 떠났고 또 아들 이삭을 바치라하니 순종하며 제단에 바쳐 믿음의 본이 되었다는 상식적인 설교를 뒤집어서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어찌보면 평범한 믿음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을수 없도록 믿음을 키워, 열심으로 이끌어서 아들까지 바치는 아브라함이 돠도록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는 것도 흥미롭고 신앙생활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이 첨부터 막 생겨나지 않아서 기가 죽고 한숨이 나오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하나하나 짚어보면

1.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으로 갈대아 땅을 떠났는가?
(창세기 11:26-12:3, 사도행전 7:2, 여호수아 24:1,2)
갈대아 우르에 살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다고 한다(여호수아 24장)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겼을까? 하나님을 섬겼을까?
목사님은 데라는 이방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둘다 이방신을 섬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믿는 신이 달랐다면 아브라함이 본인의 가솔만 이끌고 떠났을건데 아버지 데라의 주도하에 떠난걸 보면 아브라함과 데라가 같은 이방신을 섬겼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갈대아 우르를 담대히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옮기면...
' 여호아를 아브라함도 까맣게 모릅니다. 여러분과 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우리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잠을 자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금빛찬란한 광채속에 어떤 분이 나타나셨는데 감히 형상을 이를 수가 없고 감히 뭐라고 말대꾸를 할 수 없는 영광의 어떤 신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나는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창조주요 너를 지목한 신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려고 하니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고는 잠이 깼습니다. 아브라함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분을 만났고 생전 처음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의논할 최초의 대상은 아버지.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가만히 그 일을 들어보는데 아들이 땀을 뚝뚝 흘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두려워하고 너무 굉장한 표정이요 자세입니다.
아 내 아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무슨 이상한 환상을 보았구나.
촤소한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방신이라도 섬기는 종교심이 있는 자니까 그렇게까지 찾아오고 나타난 신에 대하여 거부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그의 말을 일단 듣자. 그래서 아버지가 주동아 되어서 아버지의 명령권이 해당되는 혈연들만 모아서 길을 떠나게 된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래서 떠났지만 갈대아 문화권의 최변방 하란에서 더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선 것. 이때 타 문화권으로 간다는 것은 연고지 아닌 타향에서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릎쓰는 것이기에 더 이상 가지 못한 것이지요. 거기서 몇년 살고 있는데 데라는 죽고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어 가나안으로 향해 떠나게 되는데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이러한 해석 속의 아브라함은 너무나 보통의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이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음도 없으나 두려움으로, 심상치 않은 신적 권위에 이끌려 결단을 하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것.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안락한 본토 아비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마.침.내. 가나안으로 끌어오십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믿음은 자기 최면 걸듯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요, 믿습니다 도장찍으며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설득의 마지막 작업이 이해라고 합니다. 운명을 설득하고 인생을 설득하고 마지막으로 이해를 설득해서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신다고....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의 인생 중에 나타나셨고 그 설득 작업을 시작하신 거라고....

2. 아브라함이 기근때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은 신앙의 타락일까?

앞의 관점에서 애굽 사건을 보면 신앙의 타락을 논할 단계도 아닌 믿음 없는 자의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온 후 아브라함은 두가지 중요한 상황을 만나는데 굉장히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데 롯에게 먼저 우선권을 주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고 하나는 9왕이 싸우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드는 놀라운 담대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책을 옮겨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사건은 신앙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을 논할 수준에 와 있지 않습니다. 세겜에서의 기근을 하나님이 이 기근 속에서도 나를 먹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그 수준까지 가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연히 먹고 살수 있는 곳으로 양식을 따라 애굽까지 갑니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아내가 걱정입니다. 너무 예쁘니 아내를 뺏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동생이면 오빠에게 후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동생이라고하자고 짜서 내려갑니다. 가서 정말 뺏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진 마십시요. '믿음으로 가만히 있어야되는데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내려갔더니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 그래서 그가 회개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 바로왕이 회개를 합니다.  바로는 그 시대에 세계 최고의 통치자였습니다. 시저보다도, 알렉산더 대왕보다도 강할 때입니다. 그런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하나 뺏은 거 때문에 밤새 하나님께 터집니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다 데리고 가라" 그리고 금은 보화까지 줍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바로가 이렇게 터진단 말인가?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도박을 하듯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요. 믿음은 어디다 걸어놓는 돈이 아닙니다.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넘치는 사랑의 열심입니다. 그 설득에 녹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설득해 오십니다.
믿음에 관한 얘기 중 가장 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지 않고 무슨 얘기가 됩니까? 일단 믿어 놓고 얘기합시다.
아침에 버스를 타면 운전수가 회사까지 잘 데려다 줄걸 믿고 타지 않냐며....그런데 그건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수학적인 확률의 영역입니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어버렸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해 오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 훈련을 받습니다. 그 훈련을 위한 가장 좋은 경우가 애굽에서 만난 바로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를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바로보다 세구나 이걸 배웁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와 롯과 헤어질때 롯이 먼저 결정하게 하고 너가 이리가면 나는 저리가겠다. 하는 담대함, 믿음의 사람의 태도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근에 쫒겨 애굽에 가서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겁 많았던 그가 롯이 사로잡힌 걸 보자 들고 일어나 구해 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하란 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실 때, 가지 않아야 할 곳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간섭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그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되지 않는 것을 미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기신 달란트가 하나입니까? 다섯입니까? 하나를 맡기고 다섯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맡기지 않고 찾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설득하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 라고 알게 된 부분만큼은 여러분의 책임의 한계입니다. 행하여 완전하시길 원하십니다. 그길에 많은 전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이제 예수를 믿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하나님이 누군지 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아브라함이 되겠다. 자식들 다 모여라. 하나님 어느 녀석부터 원하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요. 우리는 의욕은 충만하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겸손한 경청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여러분에게 이삭까지 내놓으라고 하실겁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의욕으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욕은 잘 다스려져야합니다. 여러분, 제일 답답하고 제일 안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오는 날 반가와하는 삽살개입니다.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하얀 와이셔츠 품속에 뛰어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은가 점검을 하셔야합니다. 한 교회가 신앙 성장을 위해서, 서로와 서로의 도움을 위해서 가고 있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상처받는 것은 언제나 이 삽살개 때문입니다. 모두가 의욕에 충만합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을 붓고 다니고 한쪽에서는 진흙탕이 범벅을 해가지고 늘 품속에 뛰어듭니다. 의욕으로는 다 됐습니다.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이삭을 요구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무어냐하면 그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설득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눈물과 오래참으심과 긍휼과 자비와 끊이지 않는 열심으로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그 경험입니다. 
지금 애굽 생활 중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묵묵히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고 우리를 완성하고 계십니다. 이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 이외에 아무말도 필요치 않은 자를 가리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기근때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신앙의 타락이 아니라 신앙 훈련의 시발점이 된 것이지요. 애굽을 나온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입니다.

3. 이스마엘 사건, 불신앙의 모습

창세기 15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에 댓구하고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신에게 두려워 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내며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믿음의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종 엘리에셀로 말미암아 나의 후사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네 몸에서 난 자라야 네 후사가 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는 사건이 나옵니다. 86세일 때입니다.
17장,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으시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무릎을 꿇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 너의 자손이 이리 많을 것이라 하시던 그 전의 하나님의 모습과는 좀 다릅니다. 이제는 책임을 물으시고 꾸짖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로 바꿔주십니다.
아들은 하나, 그것도 서자 하나 밖에 없는데 많은 아들을 가지신 아버님으로 불리는 겁니다. 매일 그 이름으로 확인하며 믿음을 가지라 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게 하십니다. 할례는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신약의 '너희가 무할례로 죽은 자였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할례는 육체적인 종족 보존 능력을 갖지 못한자가 되는 예식이며 다른 힘으로 태어난 별개의 인종이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하십니다. 
열국의 아비로 이름도 바꾸라 하시는데 젤 중요한 생식기의 일부는 잘라내라 하시는 하나님. 이 때 아브라함은 행하여 완전하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하며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납니다. 할례를 행한다의 원어적 의미는 잘라 버린다는 뜻인데 이 단어는 이사야서의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셨으리요의 끊어짐과 같은 단어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4. 이삭 사건, 믿음의 완성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백세에 아들을 갖게 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 그 이삭을 번제단의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최고봉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이삭사건을 할례와 연관지어 박목사님은 굉장히 깊이 있는 설교를 하십니다. 단순히 믿음의 훈련을 받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단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바칠정도로 믿음이 좋아졌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고 대신 숫양으로 제사를 하게 하시고 그 이후 아브라함은 이삭과 더불어 축복속에 행복하게 잘 살았으니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갖자 정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자로서 육체적인 종족 번식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육신으로는 죽은 자가 갖게 된 자식인 이삭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장할 수 있는 존재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있었다고 봅니다. 이 만큼의 믿음의 깊이.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삶은 아브라함은 제대로 맛도 보지 못하고 결국 4대째에 가서 출애굽의 그 모든 상징 사건이 있고 나서야 구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모든 구원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한 사건으로서의 이삭 사건을 해석하는, 즉 하나님의 사역의 한 점으로서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이삭사건이라는 해석을 하시네요. 
하나님이 우리와 달라보이지 않는 아브라함을 이삭을 내놓는 그 경지까지 이끌어가시는데 결코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만족시키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만족해서 더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경지까지 끌고 가실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면, 훈련이 끝나고 하산할 경지에 이르면 아브라함이 이삭 사건 이후로 그 인생에 대한 더이상의 기록이 없다가 이삭 장가 보내는 즈음으로 넘어가듯이 우리 인생의 현란하던 시험이 구비 넘어가 잠잠해지는 시기가 온다고도 설교에서 하셨는데 전 그게 엄청 은혜가 되더라구요. 하산의 경지에 이르어 고난이 더이상 고난이 아니거나 없어지는 그 경지....야곱으로도 예를 들고 요셉으로도 예를 들으셨는데 요셉 관점의 훈련과정 뿐아니라 요셉의 형제들 입장에서의 훈련과 변화도 설명해주셔서 흥미로왔던 기억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훈련을 이미 시작하셨고 때로 그 훈련을 잘 받기도 했지만  실패하여 넘어져서 회개하며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했던 거 같아요. 이삭을 내어놓는 그 경지까지 끌고 가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원으로 고집을 부리시는 분이시다하니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자리에 와 있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기대해보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