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6일 월요일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그친 sound of metal (스포 잔뜩)


미나리와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은 받지 못한 작품인데 아마존 프라임으로 보았다.
세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해비메탈 음악의 드러머이던 젊은이가 갑자기 귀가 안 들리게 되는데 그 공포가 그대로 전달되게 연출을 잘 했다. 소리가 머플되면서 희미해지고 웅웅 거라는 것을 주인공, 루빈 입장에서, 그에게 들리는 상황 그대로를 보여준다. 앨범을 내고나서  여자친구인 싱어와 같이 RV 순회 공연중 벌어지는 일. 그 메탈의 두들겨패는 쨍쨍거리는 사운드가 머플거리는 데 루빈의 공포, 어처구니 없어함, 분노, 마치 옷에 얼룩 묻으면  빨듯이  그렇게 빨리 고쳐서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싶어하는 다급한 마음,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불안정해지는 그런 것들을 너무 생생이 전달해준다. 그런 것들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게나 불현듯 닥칠 수 있고 특히 노년에는 시력이 안좋아지거나 청력을 잃는 상황들을 보아온지라 루빈의 절망을 남의 일 같이 않게 보았다.

이런 절망 가운데 루빈이 찾아간 곳은 귀가 안들리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 이 공동체는 정상인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청각장애인들만의 공동체. 셀폰도 사용 못하고 완전 세상과 단절되어 귀머거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여친이 떠나버린 어쩔수 없는 상황애서  루빈은 일단은 청각장애인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위해 공동체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다음 길을 모색하기로 한다. 수술을 하는 방법이 있긴한데 4만불~8만불. 엄청 비싸다.

해비메탈 음악을 하며 RV를 타고 자유롭게 다니던 청년이 이 조용한 공동체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데 힘들어하는 루빈에게 공동체의 리더는 자기 스터디룸을 비워주고 매일 아침 5시에, 여기에 와서  종이에 무엇이든 적으라고 한다. 루빈이 첫날 와보니 아래층 키친엔 커피와 도넛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 보니 여명이 비치는 창가에 동그란 테이블 위, 노트와 팬이 있다.
그러나 루빈은 자리에 앉아서 도넛을 주먹으로 으깼다가 뭉쳐놓고 또 으깨고....그렇게 그 아침 시간을 보냈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고요함과 그 고요함이 무너지는 내면의 분노를 잘 표현한 장면

시간은 흐르고 그는 꾸준히 아침커피 타임을 지키며 수화를 배우고 적응해가고 웃음이 늘어난다.
귀머거리로 살아가는 법을 마스터하느 즈음에 리더는 계속 그곳애서 살면서 공동체 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등 잡을 갖고 살아가는 걸 권하지만 여친과의 예전생활을 잊지 못하는 루빈은 음악장비와 RV, 있는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마련라고 귀에 인공적 장치를 심는 수술을 한다. 들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신경을 거슬르게 하는 기계음의 소리.  예전 같지 않고 불안한 상태로 그는 공동체를 떠난다. 떠나는 그에게 리더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아침 커피 타임에 무얼 느꼈냐고 묻는 것. 자기도 루빈과 같은 시기가 있었고 종이에 매일 무언가를 써가다가 어느날, still 해지는 순간이 왔는데 경험해봤냐고 묻는다.

공동체를 떠난 루빈은 여친을 찾아간다.
여친은 불화했던 아버지와 화해하고 함께 생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팔을 긁어 상처를 만들던 예전 습관도 고치고 있었다. 사는 곳도 미국이 아닌 프랑스, 부유한 아버지의 피아노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낯선 모습. 드러머와 해비메탈 음악을 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있다. 이즈음에서 보통의 전개는  여친은 다른 남친이 생겼고 남자는 분노하다 절망하고 뭐 이렇게 갈거 같은데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둘은 만남을 기뻐하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러나  루빈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 순회 공연 투어를 하자고 하자 여친은 말로는 좋다고 하지만 불안한 모습으로 팔을 다시 긁어댄다. 
서로 함께 했던 시간이 4년. 상처 투성이의 약물 중독자로 만나 서로가 서로를 구하며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힐링되었던 그 시간들이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했지만 이젠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할 때. 
루빈은 팔을 긁는 그녀를 보고 그것을 바로 알아채고 그녀를 안으며 그녀를 떠나보낸다. 성숙하게  보내준다. 이 장면이 세번째로 인상 깊었던 장면.
이 장면은  공동체로 들어갈때의 루빈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아름다웠다. 그때의 루빈은 상처입은 동물 처럼 난폭해져서 RV 안의 물건을 부수고 여친은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를 상처 준다면 같이할 수 없으니 공동체로 들어가라고 하며 떠나가는데 루빈은 가지말라고 매달렸었다.
모든 걸 팔아 위험한 수술을 하고 모든걸 걸고 그녀에게로 돌아온 루빈이건만 너무나 고요히 자기자신보다 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팔뚝을 긁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바뀐 상황을 인정한다. 이 성숙을 보여주는 루빈은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리로 나온 루빈은 쏟아지는 온갖 소음에 정신이 나가 잠시 벤치에 앉는데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때 루빈은 귀의 장치를 벗어버리고 조용한 상태, still의 상태로 들어간다. 그것이 영화의 끝.

아침 커피 타임의 위럭. 뭔가를 쓰는 것의 위력. 알거 같다. 그 리더가 말하는 still  한 순간. 모든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조용히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의 위력.
리더는 귀수술로 빈털털이가 된 루빈이 잠시만 공동체에 더 살다 나가겠다고하자 거절한다. 우리는 귀먹은 것을 장애로 여기지 않는데 장애로 여기고 수술을 한 사람이 있음으로 공동체의 분위기를 흔들어 놓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귀먹은 것을 장애로 여기지 않는다'. 맞는 말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인 것, 사람의 품위를 지키고 사는 것은 장애가 있다고 훼손되는 게 아니지 않나. 
루빈은 오히려 장애와 더불어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걸 장애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살면서 무슨 힘든 일이든, 장애든  만나게 된다면 이 영화가 떠올려질거 같고 큰 힘을 줄거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still을 찾는다는 해석은 나의 해석인데 사실 듣는 장치를 치워버린 주인공의 표정은 아직은 평안하지도 않고 lost한 듯한 표정이기도 하여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이 후 빈털털이에 기댈 사람하나 없이 기계음에 시달릴 루빈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잡음들을 다 가라앉힐 still 한 순간들을 소유하며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이 필름 작품상은 못받았지만 편집상, 음향상 받았네요. 강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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