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일요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작년 2021년 11월에 발간된 책.
김지수라는 분이 죽음을 앞두고 암투병 중인 이어령님을 1년여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김지수 인터스텔라에 책이 발간된 이후 12월에 인터뷰한 내용을 한번 더 실은 내용을 보았다. 책의 내용을 다시 짚으며 나눈 대화들이었다. 넥스트라는 제목.
그리고  2022년 2월 26일에 세상을 뜨셨으니 돌아가시기 전, 이어령님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의 지성과 영성의 생생한 기록이라 할만한 책이다.

1. 죽음에 대한 접근으로 인간을 영과육의 이원론이 아니라 영 육 마음 삼원론으로 설명하는데 유리컵으로 설명한다.
물성을 가진 컵 자체는 육.( body)
거기에 담기는 물, 술 등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우리의 마음 ( mind).
담기기 위해 비어있어야하는 void 상태를 영.(spirit)

비어있을때 그 비어있는 공간은 외부와 단절되지 않은 채 연속선상에 있고 우주에 닿아있다고. ( 공기의 연결) 비어야만 무얼 담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서 성경의 큰집에는 작은 그릇도 있고 큰 그릇도 있다는 구절이 생각 났다. 쓰임 받는 그릇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깨끗함의 문제. 정결하게 비어있는 그릇이 쓰임을 받는다.
비어 있음. void. 영이 하늘에 닿아있도록 비어있음이 중요함을 또 다른 모습으로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컵에는 온갖 감정과 생각이 담기는데 그걸 비워내고 깨끗게 하고 비어있는 공간이 다시 영으로 닿아 하늘과 통할때 우리에게 담기는 것들이 쓸모있고 귀한 것이 되리라. 
컵이 깨지는 것이 죽음. 
컵이 깨지면 그 안 내용물은 다 사라지지만 void 비어있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넘 쉽게 영혼을 설명한다는 느낌에 놀라며 달리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인드만 채우고 사는 정치가 사업가는 죽음 이후 남는게 없지만 비어있는 영혼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시인 예술가 종교인은 영원히 간다고. 그 영원히 가는 것이 그림, 시. 사상, 음악, 책등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어령도 이 마지막 인터뷰를 치열하게 하면서 죽어도 남아있을 말들을 남기는 것이고...

그런데 과연 말들, 언어로 남긴 글들은 영원히 사는거 맞나? 한 사람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남는건 맞는데 인류 전체가 사라지면 사라질텐데.. 영원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거 같다. 그 또한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mind의 영역일뿐 void 의 영역, 이데아의 세계에 닿는 것은 아닐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나 예술은 잡동사니들보다는  좀더 보편적이고 가치가 있는 mind의 영역이라 좀 오래가는거 뿐, mind의 영역을 넘는다고 할수는 없을거 같다.
Void의 영역, 신의 영역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하는 것 아닐까?

2. 이어령은 시, 책, 영화대본, 평론서등 많은 지적 유산을 남겼는데 그 지적 탐구 원동력에 항상 호기심, 재미가 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재미 없으면 멈추고 재밌는 책은 여러 번 읽었다고. 또 지루함을 못 참기에 한 분야를 깊이 파서 논문을 쓰고 하는건 못한다고... 우물 파기를 하되 여러 분야를 옮겨 다니며 세계에 대한 자기 주도적 이해를 구축해 나간 것.  지금은 죽음이라는 주제의 우물을 파는 셈. 그런데 이 부분은 김형석님과 참 달랐다. 김형석님은 한 우물을 팠고 논문도 썼고 또 어느 정도 가족을 먹여살릴  재정적인 기반을 갖춘 이후에야 돈의 액수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재미와 의미로 일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령님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 환경이었고 어린 나이부터  주목 받는 글쓰기를 해왔기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자유로웠구나 싶었다. 그는 워커홀릭이라 불리웠지만 자기가 푹 빠져서 좋아서 일을 한거 였다고...올림픽 기획과 같은 일은  돈을 받지 않고 좋아서 신나서 한거라고. 시 쓰는 것과 같은 일을 세계인이 지켜보는 큰 무대에서 신나게 한거라고. 88올림픽때의 굴렁쇠 소년. 운동장 그라운드에 시 한줄 쓴거. 크 멋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건 큰 딸 이민아 목사가 일에 몰두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해  상처 받았었던 아픈 기억을 꽤 오래 간직하고 있었던 모습.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걸까. 잘 사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다.

3. '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라고 하셨다고한다.
void 를 할수 있으려면 이 깨달음이 있어야하는 거 같다. 내 재능, 내 성실성, 내 노력에 의한 나의 전리품, 성취 이런 것들이 있을 땐 그것이 선물이라는걸 알기 어러운거 같다. 나무나 당연한 내가 노력하여 이룬 것, 내 것이고 그런 것들이 모여 나를 이루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 내가 프라이드를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할때 신이 슬쩍 스치기만 해도 한순간에 모두 날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 때, 즉 극복하기 어려운 나락같은 시련 속이 던져졌거나 중병에 걸렸을때, 죽음을 앞두었을 때등의   순간,  그런 순간엔  모든 것이 내가 노력하여 성취하였어도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환경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이를 수 없었음을 알게 돠고  내것이야 라고 주장할 수 없는 신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것이라고 채우고 움켜쥐고 쫒아가며 추구하던 것들을 내려 놓고 비우는 걸 비로소 하게 되는 것.  내 것이 아닌 선물이니 진정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나눌 줄 알게 되고 그렇게 mind를 비우며 voidi를 할 수 있게 된다.
내겐 이  깨달음은 이어령 선생보다 일찍 왔었던거 같다. 일찍 생의 위기가 있었으므로...
이어령선생은 승승 장구하는 신나는 인생이었다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무너짐의 순간, 죽음 앞에서 그걸 깨닫게 된거 같다.

4. 99마리의 양보다 길잃은 한마리 양의 모습을, 맏아들 보다는 집 나간 탕자를 더 사랑하는 삶의 태도셨다. 남들 따라서. 두리뭉실. 이런 삶을 싫어하셨다. 길 잃은 양이 더 호기심 많고 더 똑똑하고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99마리 양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느냐며 주체적인 삶에 박수를 보낸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이건 겁쟁이들은 못하는건데 나도 겁쟁이로 살아 온거 같다. 이제라도 나는 못하더라도 남을 보는 시선만이라도 폭 넓게, 틀에 가두지 않고 보고 싶다. 모험하며 방황하며 자기만의 길을 내는 사람들을 어여삐 보리라.
선생은 신념을 극도로 싫어한다. '진리를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신념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 목숨 내건 사람들이거든.' 육탄 테러하는 사람들, 나치가 다 신념에 찬 사람들이라고.  10년 전에 할 말 다하고 동어반복하는 사람은 유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죽음 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고. 안주를 모르는 몽상가요 예술가다운 일갈이다. 
물독을 채우고는 끝 하는  사람인가? 비우고 길어오르고를 반복하는 갈증하는 두레박인가? 선생의 갈증은 완벽한 글하나를 쓰는 것인데 이루지 못했기에 계속 쓰고 있다고.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라고.
' 남 쫒아가는 욕망은 물독도 두레박도 아니고 돌맹이라네. 아름답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맹이처럼 되는 거야.'

이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 나는 몇살에 죽었던건가. 

5.'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6살때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죽음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오의 절정. 존재의 절정에 그림자들이 싹 사라진 그 순간. 절정을 찍고 하락으로 갈 그 순간에 흘린 눈물은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감지였다고.
이런 감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외에도 글 아곳저곳에서 몇번의 순간에 대한 명징한 포착을 풀어내는데 이런 부분이 예술가는 다르구나 느끼게한다.
명철하면서도 감성적인데 선생 스스로가 극단적인 두가지 성향을 동시에 지녔다고 하신다.  편집증적이면서도 정신분열적. 그러니까 평소에 엄청 어지르며 지내다가도 정리를 시작하면 각을 딱딱 맞추고 약간의 흐트러짐도 용납 못한다고.
시인이다가 퍙론가일수 있고 작가이다가 장관일수 있는 선생의 이럭에 대한 설명인거 같다.

다시 죽음의 주제로 돌아가서 어렸을때 하는 놀이, 까꿍. 엄마 있다 엄마 없다 놀이. 그것이 이미 죽음에 대한 놀이라고.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 극복의 놀이라고. 그 까꿍 놀이가 결국 문학이고 종교라고. 
그러네요. 없는 즐 알았는데 까꿍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이땅에서 사라졌으나 천국에서 영원히 만남을 믿는 것이 종교네요.
그리라여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 죽음이 생의 마지막에 불현듯 찾아오는게 아니라 삶의 켜켜에 함께 한다.

또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집으로 부르는 거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향으로의 귀환. 이 부분은 똑 같은 표현을 원종수라는 분의 간증 테이프로 들었었는데 그 분은 땅 따먹기 하며 놀고 있는데 어스름 땅거미가 몰려오고 친구들은 하나 둘 저냑 먹으라 부르는 소리에 집으러 향하고 혼자 남아있던 그 느낌을 말하며 언젠가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시면 놀고 있던거 다 놓고 간다고, 땅따먹기 하던거 다 놓고 간다고.했었다.
이어령선생은 다 놓고 가지만 그래도 언어는, 글은, 정신의 산물은 남는다 여기시기에 마지막을 불사르며 이런 인터뷰를 하신다. 치열한 인문학자.

6. 운명에 대하여
선생은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고,  그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결정된 운이 7이라면 내몫이 3이 있다고. 그것이 자유의지. 탕자는 아버지 집에 돌아올 운명이었건만 떠나고 방황하는데 그렇게 해야 진짜 자기를 찾는다고....
또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되고 자조를 경계해야한다고.

선생의 운명은 프레임에 갖히기 싫어하고 끊임없이 의문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어렸을때부터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꼬치꼬치 따져 물었기에 이쁨 받고  환영 받는 아이는 아니었고 늘 외로웠다고 한다. 선생이 된 이후에도 강의실은 그득 탔으나 스승의 날에 꽃을 별로 받지 못하는 선생이었다고.
뜬소문에 속지 않고 비논리에 저항하는 따지기 좋아하는 성품의 운명. 
그래서 외톨이 였는데 선생은 하나님에 디한 이미지도  무척 외로운 존재라는 부분이 크게 와닿는다고 한다. 선생 정도의 사유의 차원으로도 교류할 사람 찾기 힘들고 외로운데 하나님은 오죽 하시리.

7. 자연계 법계 기호계
이 세상은 자언계 법계 기호계가 있는데 잘 구분하고 혼동하지 말아야한다고. 이부분을 설명하면서 알렉산더와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너무 좋아 그대로 옮겨본다.

"대제국을 건설한 알릭산더가 조그만 통속이 들어앉아 햇빛을 쬐는 디어게니스에게 그랬어. 나는 정복자니 왕국의 일부를 너에게 즐 수 있다. 소원을 말해보라. 비키시오 당신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오.
디오게네스는 알고 있었어. 알릭산더가 지배한 건 법계의 세계였다네.
왕국은 네가 지배하지만 햇빛은 지배하지 못해. 왕국은 네것이라도 태양은 자연의 것이다. 그러니 비켜. 나 지금 햇빛 쬐고 있는거야. 네 권력 쬐고 있는 거 아냐. 난 이통 속에서 살아. 네 왕국이 아니라..
디오게네스에게 통은 생각의 세계야. 그래서 권력자 앞네서 단호할 수 있는거지. 네가 지배하는 세계로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내 생각을, 태양빛을 너는 지배할 수 없다고. 넌 그저 말타고 땅 따먹는 권력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독재자들이 그걸 몰라. 자기가 하늘도 움직이고 바다고 때라고 햇빛도 가랄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비논리에 저항할 수 있어야 자유인이지.'

기호계의 세계가 생각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고 법계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선생은 법계를 주무를 기회를 마다하고 기호계를 택하여 글을 썼던가싶다. 선생이 문화부 장관일 때 탄생시킨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무회의에서 반대하는 타부 장관들에게 왜 예술에 관한한 영재교육이 필요한가를 5분 연설로 설파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인문학자의 사고력과 언어구사력의 힘을 보여주는 멋진 연설이었다. 길어서 다 옮길 수 없는데 넘 멋지다. 법계에 좀 더 계셨으면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훨씬 좋았을텐데 싶다. 임윤찬이 한예종 출신인데 그의 우승을 보셨더라면 정말 기뻐했을텐데….  법은 시공간에 얽매여 바뀌지만 기호계는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력을 갖기에 더 멀리 내다보시고 백년대계의 법을 세워 나갔을 거같다. 그러나 떼거리 문화를 혐오하는 선생으로서는 더 오래 정치권에 머무를 수 없었을게다. 
(연설을 전문 그대로 실은 블로그를 찾아서 링크. 그러나 이 책에서 선생이 무용담처럼 말해주는게 더 생동감있고 재밌다.)

우리 삶은 정치 경제구조 법 체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내가 북한이나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어찌 살았을까 생각하면 아찔한데 그런 곳에서도 세뇌되지 않고 자유인으로서의 사고와 생각으로 제도의 프레임에 갖히지 않고 제대로 삶을 살아낼 줄 아는 건 기호계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저항자가 되어 법계를 바꾸는 삶이 아니더라도 자연계와 기호계를 누리며  법계를 꾸짓는 디오게네스처럼 멋질 수 있을거 같다. 요즘 특히 미국이고 한국이고 간에 한번씩 대통력 선거를 치를 때마다 바뀌는 법계의 세상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내게는 자언계와 기호계가 있음이 위안이다

8. 피 언어 돈의 교환
세상이 복잡해보야도 피,언어, 돈 이 세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셋은 경계가 다른건데 혼합되면 불행해진다.
나는 첫사랑과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는 무잣집에 시집보내려하면 피와 돈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아침 드라마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언어 교환의 산물인 사상, 정의, 선, 가치등에 돈이 끼어들면 잘 팔리는 글 써라, 영화 찍어라 하게 되어 예술가가 불행해진다는 것.
명쾌하다. 
아이들 걸혼 하게 될때 특하 기억해두어야지.

9. 전체와 개인
전체를 위한 결정에서 항상 개인의 관점을, 제도 맹점을 함께 봐아한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선생은 한마리 양을 찾아나가는 얘수의 마음을 보라고 한다.
한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다른 아흔아홉 마라도 길을 잃을 수 있고 한명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를 숫자의 논리로 겅중을 따져서는 안된다고.
나 없는 우리는 없다고. 
'떼' 로 살지 말고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때 '내'가 있고 그런 나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거고 그때 비로소  우리가 있는거라고.

10.  이타성
기브, 테이크, 그라고 라퀘스트. 
성공한 사람 중에 테이커보다 기버가 많다고 하는데 잘 리퀘스트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와로 도움을 줄 준비를 하고 있고 잘 부탁하먼 유용한 자원을 잘 유통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질문하자 선생도 같은 생각을 나타내셨다
돕는게 생존에 유리하다고.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성으로 프로그레밍화되어있다고.

카라마조프의 형제에 나오는 파뿌리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갔지만 수호천사가 하나님께 노파가 생전에 파뿌리 하나를 준적이 있다고 간청을 하자 파뿌리를 붙들고 천국으로 옮겨 지는데 다른 놈들이 살려달라고 파뿌리에 우루루 달려들자 이때 노파는 내 파뿌리야 소리치고 우루루 다시 지옥불로 던져졌다는...
어쨌거나 우리 인간은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파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줄 마음을 갖고 있고 남을 위해 뭔가 해주려는 마음이 있다고 본다. 
천국엔 가까스로 파뿌리 잡고 온 사람이 가득하다고. 
죽음의 수용소 체험기를 보면 아비귀환일거 같지만 평소 모습과 다르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고. 극한 상황이 되어서 위선 위악이 벗겨지고 숨은 모습이 드러난다고.

난 이어령 선생의 이타성을 딸 이민아 목사가 하나님을믿으라 권했을때 딸이 간절히 원하니 최고의 지성으로 묻고 따지기보다 딸의 간절한 부탁이니 들어 주리라 하며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기로 한 그 부분이 이타적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파뿌리가 된거 같다는 생각. 평생을 따지고 살던 선생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따져 물어 깊어진 지성이 딸을 사랑하여 '너가 그렇게 간절히 원한다면 내 지성을 버리고 내 지성이 가져다 준 명성을 버리고 그렇게 하리' 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
( 누굴 젤 만나고 싶냐는 질문에 선생은 추운 날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바깥에서 30여분을 떨고 기다리던 한 여학생이 울먹이며 선생님 죽지 마세요. 하는데 그래 그래 안 죽고 낫도록 해보지.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 이런 투로 말한 적이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지금 그 여학생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고. 만나면 안 죽을거야. 말해주고 싶다고.)

파뿌리 이타성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이 나온 후 한 인터뷰 넥스트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오징어게임으로 설명을 하신다. 주인공의 착함이 걸국 승리한다고. 똑똑함을 이긴다고. 더구나 AI 가 인간의 똑똑람을 능가하는 미래 사회는 착함, 도덕성이 정말 중요 가치가 된다고. 
착함이 승리한다.

11. 럭서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터리텔링을 얼마나 갖고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류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서리한가? 

12. 화문석과 무문석
모양이 들어가있는 화문석이 더싸고 아무 무늬없는 무문석이 더 비싼 이유는?
아무 무늬 없는 걸 짜려면 재미가 없어서 힘이 더 들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화문석을 신나게 짜며 살아온듯. 

이 부분에서 다시 오징어게임이 생각난다. 
돈으로 살수 있는 재미는 현란한 무늬짜기의 화문석인듯해도 점점 무문석이 되는 듯. 점점 더 쎈 자극을 원하다가 사람 죽이는 오징어게임을 설계해놓고 쫄깃해하는 그 부자 영감. 
선생이 추구한 인문학의 세계는 끝이 없이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한 듯하다. 지금도 뭔가 발견하면 환희이 차서 잠자는 아내를 깨워 말하지 않고는 못견딘다고 넥스트 인터뷰에서 그러셨다. 예술가적인 인문학자는 선생의 운명인듯.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신에 가까운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고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주어졌는데 획일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인간은 화문석 짜기,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신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도 실수를 안하는데 인간은 실수할 수 있어. 악도 선도 행한다네. 그래서 선악과야.' 
명쾌하다.

13. 용서에 대하여
나는 용서 받을 사람이지 용서 해줄 사람이 아니야. 백번 생각해도 다르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고 저사람이 나를 용서해야지.
우와. 너무나 기독교적이고 깊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부딪쳤던 용서의 문제. 이 경지면 해답을 줄거 같다. 물론 그 살인자가 용서받았다 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고 )

14. 영성
양성이란 무엇일까.
선생은 영성은 밖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달러가던 지하철이 예고없이 갑자기 지상으로 나올 때 맞게되는 눈부신 햇살의 세례. 그와 같은 느낌으로 온다고 한다.(프랑스 크로카데로 노선)
신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방문 하신다고. 재앙이 예고 없이 덮치듯 신의 구제도 그렇게 온다고.
물론 사진을 찍기 위해 인화지가 있어야하듯이 영적판이 준비는 되어 있어야 셔터를 눌렀을 때 상이 찍히며 순식간에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고.
"그런데 내 딸  민아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머무는데 나는 미끄러져서 계속 땅이 떨어져."
민아 목사님은 암에 걸렸어도 마지막까지 하나님 전하며 설교하며 영적인 충만함을 보여주었다고한다. 선생은 닿는 순간들은 있으나 뚫고 나가지는 못한다고. 선생의 지성이 미끄러지게 하는 듯.. (mind에  귀한 걸 담아도 void의 세계로 들어가기는 어려운거 아닐까.)

이렇게 묘사되는 영성의 세계는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거 같다. 굴렁쇠 굴리던 소년의 순간 포착 감성과 영성이 있기에 이런 체험이 가능한걸까 싶기도 하다. 빛을 포착할 인화지 준비가 덜 된걸까? 

죽음, 죽어가는 것에 대한 지적 우물을 파며 그의 언어로 우물에서 길어올린  청량하고 신선한, 약수 같은 물을 전해 주고 싶어한 선생은 솔직하셨던 거 같다. 유언은 청개구리 부모의 유언처럼 솔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섰지만 내가 보기엔 본인의 약점까지 다 드러낸, 또 때론 으스대며 자신을 자랑하기도 하는 솔직한 인터뷰였던거 같다. 관계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그의 유언이 사랑하라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너를 더 추구하고 너를 쫒아가라 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눈을 번쩍 뜨게 된다.
나의 스토리, 나의 언어를 찾아 고개를 들라.

선생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손실임에 틀림이 없다. 치열하게 인문학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파고 들며 혜안의 빛을 던져주며 사회를 병들지 않게 지켜주던 지적 거인. (이 책 한권 읽었는데  인문학책 수십권 읽은 느낌. 그것도 핵심만 딱 집어서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지적 바다 속에 맘껏 유영하기를 원했던 선생을 보며 
진선미 중 지나치게 미의 추구.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미. 인스타적인 물질로 추구하는 미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말풍선 하나가 내 머리 위에 하나 그려져서는 사라지지 않는 느낌이다.



댓글 3개:

  1. 죽음에대해 이렇게논리적으로 때론감성적으로 말하기쉽지않지.지성인다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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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덕분에 좋은 책 읽었어요. 죽을 때까지 지성을 놓치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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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5분 연설 전문 찾아서 링크 걸었어요. 인문학자만이 할 수 있는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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