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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4일 목요일

브로드웨이 뮤지컬 Dear Evan Hansen





피츠버그 다은타운, 베너덤 센터에서 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갔어요.
PNC 뱅크에서 후원해서 어찌어찌 공짜 티켓을 얻게 되어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주차는 하인즈홀 맞은편에 있는 가라지에 이벤트 파킹으로 20불 내고 주차했어요.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은  음료수, 알코올 섞인 음료조차도 마시면서 관람 가능하더라구요.
의상은 자우롭게들 입고 오고요.

이 무지컬, 넘 좋았어요. 
무대가 화려하고 등장인물 많이 나오는 쇼는 아니예요. 
내용이 이민자로 사는 우리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꼈던 틴에이저에 대한 내옹인데 코메디적인  표현으로 의미있으면서도 재밌게 표현 했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토니상 비롯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예요.

고등학교 시니어인 Even Hansen은 친구도 없고 대화를 잘 이어나가지 못해 고립되어 학교생활을 하고 7학년때 집을 나간 아빠와는 그 이후 만나지 못한채 엄마와 단둘이 살아갑니다. 엄마는 에반을 사랑하지만  생계를 책임지느라 항상 바쁘구요.
정신과 상담을 받는데 의사는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스스로를 격려해보길 권합니다.
디어 에반 핸슨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서 어쩌다보니 학교에서 프린트를 하게 되는데 그 편지를 본 동급생 아이에게 뺏기게 되어요.
그런데 그 친구 또한 친구가 없고 고립되어 있고 폭력적인 면도 있었는데 그만 그 다음날 자살을 해버려요. 그런데 그에게서 편지가 발견되고 그 부모는 그 편지를 자기 아들이 에반 핸슨에게 쓴 편지가 생각하고 그 둘이 친구였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 가족의 여동생을 좋아하고 그 내용도 편지에 담겨 있었던지라, 또 친구없이 외로웠던 친구의 삶을 온가족이 슬퍼하고 자책하자 에반 핸슨은 그만 그 편지를 자기가 썼음을 숨기고 둘이 절친이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커져서 둘이 비밀 계좌를 열고 이멜을 주고 받던 사이였다고 말하게 되고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금 마련을 하는 등 일은 커지고 이 과정에서 에반은 더이상 왕따 당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 파플라한 아이가 되어가요. 소원했던 죽은 학생의  동생과 사랑을 나누게도 되구요.

이때 에반은 팔이 부러져 기브스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친구랑 둘이서 애플 팜에 가서 재밌게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양 말하게 되었고 그 애플팜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은 커져서 잘 살았던 죽은 친구의 부모와 학교 친구들이 보태어져서 친구를 기억하는 펀드를 모아 멋진 프랜드쉽의 상징이된 애플팜을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게 되지요. 이때 두친구가 코프레지던트와 회계를 맡으며 이런 일들을 칼리지어플리케이션의 놓은 기회로 삼고 이용합니다.

에반은 일하느라 바쁜 엄마와는 점점 멀어지고 거짓된자신의 모습에 점점 심취하여 가고….이렇게 스토리가 흘러가요.

대사는 어느정도 이해하지만 노래 가사를 이해하는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지만 쇼를 즐기기에는 충분했어요. 남들 웃는데 못 웃고 있는 순간들이 있긴 했지만요. 
사전에 무슨 내용인지 좀 조사를 해서 가기도 했고요.

사회적 고립감, 프랜드쉽, 선의의 거짓말, 내가 아닌 모습으로 척 하며 사는 것, 칼리지 어플리케이션 과정,  SNS. 로 만들어지는 이미지와 실제 모슴과의 차이등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요.

마무리 부분 엄마와 주인공의 대화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엄마 앞에서 에반이 I am broken. 이라고 괴로워하자 엄마가 no matter what, 너가 어떤 모습이든 항상 에반 옆에 있어줄거라 하고 진실을 밝힐 용기를 주어요.

쇼의 구성, 무대 배치등도 탁월해요 
추천합니다.
아직 시간 남아있는데 좋아요~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 많았지만 만석은 아니었어요.

에반과 여친과의 관계, 아니 에반과 자살한 학생 가족과의 관계에서
폐북에서 읽은 정지우 작가의 글도 생각났어요. 진정한 에반의 모습은 모른채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에반에게서 보고자 하니까요.  뒷부분은 줄이느라 아주 약간 첨삭했어요.

"우리는 흔히 사랑은 '두 사람만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의 관계에는 하나의 존재가 더 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상대방, 내가 그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는 사실 순수하게 상대방과만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내 안의 당신'과 관계 맺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삼각관계이다. 

우리는 때로 상대방 그 자체보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을 더 사랑한다. 이를테면, 내 안에 어떤 상식과 윤리의 기준이 있다고 해보자.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거나,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여러 기준들이 있다고 하면, 나는 상대방이 바로 그런 내 안의 기준에 맞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만약 그런 기준에 상대방이 어긋나면, 때로는 사랑을 포기할 수 있다. 그가 알고 봤더니 과거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을 순식간에 차게 식을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내가 사랑한 것은 '내 안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은 내가 믿는 바 그대로의 사람이어야 한다. 가령, 바람을 피우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적당한 능력과 책임감이 있는 것 등이 모두 내가 사랑하는 나의 기준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기준이자 사회의 기준이지 '당신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바로 그 기준을 사랑하고, 그 기준과 관계맺는다. 그 기준에 맞는 당신이 내 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은 마치 혼자 하는 행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이 그럴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역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과 내 안의 당신을 사랑하는 일 속에서 늘 갈등한다. 진짜 당신과 내 안의 당신은 늘 일종의 '긴장관계'에 있다. 그래서 사랑은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과만 하는 것도 아닌 '삼각관계'인 것이다. "

(사랑은 내 기준과 진짜 당신이 부딪치고 갈등할때, 적당한 지점에서 화해하고 새롭게  재정립되어 가는 가운데 존재하고 이어질 수 있는 무엇인 것이다.) 

이 거리를 가장 줄일 수 있는 것이 기독교가 삶의  가치관으로 바로 잡은 사람들끼리의 결혼이 아닐지 그런 생각도 하고요.

이글의 통찰력이 맘에 들어 이 작가의 사랑에 대한 책,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를 사볼까 생각 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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