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이라는 정체성을 일터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갈 것인가 에 관한 책이다.
21세기의 C.S. 루이스 라고 여겨지는 팀 켈러. 그의 책을 처음 읽는데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과연 뉴욕의 지식층들을 사로잡을 만한 논리력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런데 씨 에스 루이스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동화를 쓰고 환타지와 상상의 세계를 끌어들일 줄 아는 그런 능력이 있을 거 같지는 않은 스타일의 글. 위트와 여유가 있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글은 아니고 진지한 글.
팀은 목사였고 루이스는 학자요 문학 전공자였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 책이 좀 딱딱했다. 그러나 생각해볼만한 많은 부분을 커버하고 있었다.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주부가 적용하기엔 부담스러운 주제라 책을 시작하기가 망설여졌는데 아직 일하고 있는 젊은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었으니 속과 성을 분리해서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성스럽다는 생각을 배격한다. 또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급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을 잘 설명해주어 그 부분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게 되었다.
1.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언젠가 이루어질 아름다운 완성된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감당하며 창조적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 언젠가 새 세상에서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소명은 부르신 이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지 자아 실현을 하고 성공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소명은 믿음에 기초하는데 루터는 고백하기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온갖 선한 것을 넘치도록 가졌으니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온전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즐거이 주님을 쫓아 이웃에게 나를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라고 말한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야한다.
2.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다른 신들은 인간에게 일을 시키는데 하나님은 일하셨고 에덴동산을 만드는 정원사이셨고 온우주를 만드셨다. 그리고 손수 만든 그곳에 인간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도 일의 존엄성과 가치를 알아야한다.
영 만을 중시하며 육적인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크리스찬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일은 노예에게 시키고 고급한 시민은 정신적인 것, 고매한 철학과 사상을 논해야한다는 아리스토테렐스나 플라톤 같은 시대의 사상과도 다르다. 영과 육의 균형을 유지하고 물질 세계의 노동을 중시한다.
3.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 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이 원리에 따라 은사와 열정을 따라 자유롭게 일을 선택한다면 상대적 박탈감이나 질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인간의 일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된다.
4. 세속적인 노둥을 하찮게 여기고 종교적인 일을 높이 떠받드는 중세적인 옛관념은 구원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루터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서원을 하고 세상과 격리된 가혹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신앙적인 의식과 규범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열심히 사역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애 성경에서 제 힘으로 이룬 선한 공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저 유명한 깨달음을 얻는다,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음은 일에 대한 또다른 통찰을 준다. 옛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속을 받으려 애썼던 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 자존심과 자부심)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복음은 복음은 일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고 정체성을 지키라는 압박에서 해방시켜 준다. 어울러 단순 노동을 우습게 여기고 고상해보이는 일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제 일은 종류와 상관없이 인류를 값없이 구원하신 하나님과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 까닭이다. 성경의 원리를 제대로 깨달은 크리스찬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하는 일의 진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보는 사람이 된다. 오직 은햬로 구원을 받았을 뿐 본질적으로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떄문이다. 그들의 발명과 창의성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많은 것들을 우리 모두는 누리며 살고 있다. 이처럼 혁명적인 노동관으로 일은 모든 일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5. 창세기의 타락이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어떻게 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게 되었고 자기 중심의 죄가 들어오면서 갖개 되는 수치심은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을 향해 갖는 불편한 감정’ 이라 정의 할 수 있고 이는 불안감과 자신을 입증하려는 노력, 반항,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맹종등으로 나타나게 만들었다. 즉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기 중심으로 자기가 주인이요 하나님이 되어야하는 죄가 둘어왔으니 이 부조화로 인한 어려움둘이 생긴 것. 또 타인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차단하고 거리를 두며 방어적, 경쟁적인 된다. 각자 다 하나님이 되려고 하니 당연히 생기는 갈등인 듯.
그 아후 창세기는 사랑과 결혼의 아픔과 일의 수고로움을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출산과 경작은 고통스러운 노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러 문화권에서 같은 단어 lavor룰 쓴다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지만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에서 먹거리도 예고가 된다. 좌절과 성취가 동시에 예고 되고 아름다음과 천재성을 언뜻 드러낸다. 이런 세상에서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구권 사역에서 소망과 위안을 얻고 현실에 무릎 꿇지 않을 힘을 얻으며 동시에 이 세상의 완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절망하지 않는다.
6 직업이나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지난 세월보다 현대인에게 더 활짝 열려 있다는 점도 단단히 한 몫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극도로 제한된 범위 안의 직업, 돈을 잘 벌고, 남애게 인정 받으며, 근사하고 신나는 직업이라 생각되는 직업군에 몰린다. 잘 맞지 않거나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대다수가 성공하기 힘든 분야에서 일하는 청년이 부지기수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 (특히 저자는 뉴욕의 리디머 교회의 목사님이었으니 그런 현상을 많이 보고 데이타도 갖고 있다.)
7. 일을 해나가며 만나는 유혹,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어김없이 마음 속 깊은 데 자리 잡은 확신에서 비롯 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결정적으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이다.
8 자본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를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류의 보편적 목적을 주장하지 않으므로 가진 것은 수단이나 기술 뿐이다. 말초적인 만족을 삶의 특질로 여기고 소비자로서의 기능에 자아감을 얻는다. 브랜드 선택을 통해 페르소나를 창출하고 온라인에 정체성을 구축하라는 속삭임을 끊임없이 듣는다. 현대인의 행복한 삶은 '잘 되어가는 것'이고 고대 문화의 인격과 성품적 요소를 포함하여 '잘 사는 것'과는 달라졌다, (좀 어려웠는데 인스타에 보이는 모습은 인격과 무관하게 잘 지내는 것, 잘 되어가는 모습인 것이니 그런 의미로 잘 되어가는 것을 이해하면 되려나?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주장이라고 한다.)
9.이런 현대 사회에 기독교적인 나레이션, 세계관은 어떤 힘을 갖는가? 다른 사상은 영과 육의 분리처럼 창조 세계의 일부를 악으로 규정하여 분리시키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계획), 타락(문제), 구원과 회복 (해결책) 으로 압축된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해결책이다. 너무나 독특하지 않나?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크리스챤들은 언제가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시고 온갖 죽음과 고통을 끝내시며 절대적인 평안과 정의와 기쁨을 온 땅에서 영원토록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 세계를 구현시켜 나가고자 일한다.
일터애서 크리스찬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10.아이비 학교의 설립자들은 ‘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 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 ’ 이었다.
이처럼 복음적인 세계관은 문화 정치 경제 윤리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토대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과학 기술의 진전,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민주주의의 기풍,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를 경제자유와 시장 발전의 기초로 본 사고방식 등은 기독교 신앙이 불러온 문화적인 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용서와 섬김이 복수나 체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식은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11. 이분법, 세상일과 하나님 일을 가르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인간은 예외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기에 달란트와 재주를 주셨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이들이 큰일, 더 나아가 크리스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내는 걸 놀라워할 이유는 없다. 로마서 1장과 2장애 따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정직, 정의, 사랑, 황금률 따위가 미리 장착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또 하나님은 광대한 자연과 그 자연을 빚어내고 채워 가는 문화를 통해서도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이것을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선물을 쏟아부으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셨다. 모짜르트는 예수를 믿었던 안 믿었던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문화를 두루 연구해야한다. 일반 은총의 개념이 정리되지 않는 한 비기독교인이 윤리적으로든 지혜로든 기독교인을 앞지르는 연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죄의 교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세계관이 빚어내는 수준만큼 선해질 수 없다는 뜻이고 일반 은총의 교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릇된 세계관을 따라가면 당연히 이르러야할 정도까지는 엉망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크리스챤의 스토리에서 악당은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죄의 실존, 그 자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세상을 섬기는 일에 힘을 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죄엥 갖힌 인간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칼뱅의 말을 인용한다.
'왜곡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도 얼마간의 불꽃들이 어렴풋이 타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채는 지독한 무지에 가로막혀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은 둔해질 때로 둔해진 탓에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는 일에 얼마나 무능해졌는지 모른다.'
( 이분법 적인 얘기들을 많이 들었었다. 해적선에 있으면 아무리 솜씨 좋은 선원이라도 해적짓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렇게 신자와 불신자를 이분법 적으로 분리하고 불신자들의 활등들을 폄하한 얘기들 이었는데 이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또 고 3 수험생의 교회 출석 문제, 주일엔 공부도 하지 않고 엄격히 지키는 문제등 여러가지를 이 카테고리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나는 대체로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게 된다.)
12. 기독교 이전의 동서양 문화들은 구원을 비인격적인 익명의 상태로 들어가는 입구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세상을 지으신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 궁극적인 실재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개성이 보장되지 않고 맹목적인 구원 교리에서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통해 자발적인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로 넘어가는 요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가운데 이미 누리셨던 사랑과 기쁨, 존경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크리스찬 스토리 라인의 선두를 차지한다. 기독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문화적, 윤리적, 인격적인 상태를 떠나 존중과 사랑을 받을 ,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졌다는 시각을 고수한다. 이런 의식은 기독교 이전의 문화에서는 생성된 적인 없었다. 따라서 크리스찬이일하는 방식에서 어떻게 하면 이런 신앙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13. 일을 통해이웃을 사랑하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능숙함이다.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을 인용하면,
교회가 목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보통은 취하도록 술을 들이키지말고, 여유 시간에 망나니 짓을 하지 않으며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라고 타이르는게 고작이다. 하지만 교회가 해주어여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쫒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한다.
그리고 소개되는 극적인 일화
1989년 2월 24일 뉴질랜드로 가는 유나이티드에어라인 항공기가 호놀룰루 공항을 떠나 상공을 나르는 중, 보잉 747기의 화물칸 앞문이 뜯겨 나가면서 항공이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승객 9명이 빨려나가 목숨을 잃었다. 착룩 가능 지점까지 날아가려면 200 km 를 날아야하는 상황. 기장 데이비드 크로닌은 온갖 지혜와 38년의 비행 경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어 무사히 기적적으로 착륙시켰다. 사고 당시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기장에게 묻자 "승객들을 위해 잠깐 기도하고 곧바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재난을 코 앞에 둔 이들에게는 기장이 동료들과 얼마나 사이좋게 지냈나. 다른 이들과 신앙을 나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문제는 탁월한 조정 능력을 갖추었나 일 뿐. 크리스챤의 소명 완수를 위해 각자의 달란트를 최대한 노련하고 능숙하게 활용하도록 노력하고 준비되어야한다. '능숙한 솜씨는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14. 바울은 주인, 고용주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들 억시 그리스도의 종임을 강조한다. 1세기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노예는 매질과 협박 등의 학대를 당연시하는 존재였기에 바울의 가르침은 소킹한 것이었던 것.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에 인종이나 계급이나 교육 정도에 따라 누군가를 남다르게 대하지 않는다. 너나없이 똑같이 죄의 심판을 받았으며 똑같이 믿음을 통해 은햬를 입었다. 노예보다 주인이 더 나은 인간이거나 영적으로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위협과 두려움을 동기로 일하게 함을 그치고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 일들을 도모해야한다. 주인이든 종이든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일하는 마음가짐은 책임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15. 크리스챤은 인정사정 없다는 얘기를 들어서는 안된다.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고 화해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절절히 느껴져야한다. 앙갚음하거나 신앙이 깊은 체하거나 악의를 품는 기색이 없어야한다.
실제 교회에서 있었던 감동적 사례를 든다. 한 아가씨가 출석하여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아본다고 하여 그 동기를 묻자, 직장 상사 때문이라고 한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파면 당해도 할말이 없을 만치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상사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자 뒤집어 쓰고 불이익을 감수 했다고 한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묻자 쑥수러워하며 답을 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고는 '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떠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 닿는데까지 남들의 짐을 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크리스챤은 또한 난관과 실패 앞에서도 평온하고 침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한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을 상기하면 실패와 좌절에서도 일어설 힘을 얻는다. 제한된 이땅의 보물을 얻으려면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면 안되겠지만 하늘에 쌓는 보물에는 리밋이 없고 사다리를 올라야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어떤 모양으로도 쌓을 수 있다,
본질적으로 부패가 없는 구조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통상적인 업무 처리 방식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는지를 늘 탐색해야한다.
16.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 에릭 리델. 금메달을 놓칠지언정 주일을 지키며 그리스도안에서 깊이 쉬려한 인물.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가 주종목이었으나 예선이 일요일로 잡히자 출전을 포기하고 더음날 열린 200미터에서 동메달을 땄고 이미 허들에서 메달을 딴 친구가 400미터 출전을 양보하여 400미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딴 실존 인물.
누이와 얘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빨리 달리는 재주를 주셨고 달릴 때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 뛰는 일 자체가 즐거운 데다가 그런 재주를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게 좋아서 달릴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열정으로 마음을 다해 일하되 안식을 누려라 라는 상반된 듯한 말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눈크 디미티스는 누가복음 2장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직접 본 시므온이 했던 말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는 뜻. 색스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은 어느날 밤, 32분짜리 찬양, 지고의 사랑을 연주하고 나서 눈크 디머티스를 속삭였다. 그 이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연주하는 사슬에서 해방되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만끽하며 음악을 위해 청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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