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다, 장신 세계가 이상하다. 이런 얘기를 사전에 많이 듣었는데 예방 주사를 맞아서인지 오히려 읽을 만 했다.
소설의 처음에는 패미니즘 소설인가 했는데 그 보다는 남녀를 떠난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 육식동믈적인 면을 다룬다.
동물적 폭력성이 몸서리 쳐지게 싫은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꾸고 하루 아침에 채식주의자가 되는데 이런 그녀를 주변 인물들은 이해하려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결국 영혜는 인간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싶어진다
영혜에게 폭력을 행하는 그녀를 둘러싼 세남자, 남편, 형부, 아버지가 세 스토리,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로 드러나고 그녀의 언니는 그녀를 도우려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세 스토리 중, 몽고반점 부분, 왜 몽고반점을 스토리 안에 갖고 들어왔지? 가 의문이었는데 그냥 단순한 이유인거 같다.
몽고반점의 푸르딩딩한 색이 식물적인 색이라, 영혜의 몸에 식물 그림을 그리는 시작점이 될수 있는 포인트, 즉 영혜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식물성의 표상 같은 것일 수 있어서 인 거 같다.
어렸을 때 있다가 사라지는 몽고반점이 식물성의 상징이 된 것.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비폭력성을 어린아이 시기에만 있는 몽고반점과 연결시켜 인간의 식믈성적인 특성의 표상이라고 본 것이.아닐까 한다
영혜는 어른이 되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몽고반점을 지닌, 이 동물적 야성의 세상을 살아가기가 넘 나 힘겨운 존재였는데 가까운 사람 누구도 그녀를 이해해주고 알아봐주지 못했다. 가까워야할 남편, 언니, 형부, 아버지, 엄마 그런 관계들에 둘러싸여 오히려 이들의 폭력성으로 죽어간다.
팬데믹 때 인류 멸종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이후에도 이 지구에 남아 있을, 식물의 우월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인간의 수명은 고작 100년인데 수백,수천년을 생존하는 나무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나무의.생명성에 대하여 존경과 경의로 바라보는 마음이 잠시 되었었다. 저 선덕여왕 때부터 현대의 이 시점까지 인간이 바쁘게 왔다갔다 설쳐대는.모습을 다 보며 한자리에 지키고 서 있는 나무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적인 방식으로도 생명성을 참 오래 유지하는구나 하는 생각. 인간과 동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배경 역할을 한다고 보던 식믈에게, 그래 너가 위너다. 하는 마음을 가졌었던.
인간의 폭력성이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더니 인류 멸종의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는 듯 했으니 길고 오래 지구에 생존하고 있는 식물의.생명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마음이.들었었는데,
그런 생각들의 지점이 이 소설과 맞닿아있는 듯하다.
인간의 동물성 ,야성, 폭럭성에 신물이 나서 그것이.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버겠다며 거부해버리는.
인간 안에서 선악을 갖고 지지고 볶는 이야기들만 보다가 갑자기 인간 아닌 식물? 이렇게 튀어나가 경계를 허물어버린 이야기를 만난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 식욕과 성욕을 맘껏 뒤흔들고 비웃어 버리는.
채식주의자에서 시작된 식욕에 대한 반항은 나무 불꽃애서 절정을 이루고 성욕 부분은 몽고반점에서 다루어진다. 예술로 포장하지만 걸국 포르노적 욕망.
식물은 스스로 광합성을 하니 다른 생명체를 해하지 않아도 되고 생식도 우아한 방법으로 꽃을 피워 한다.
깨끗하고 정결하고자 하는 몸부림인데 내용은 처절하고 피투성이라서 섬뜩했다.
한강 작가는 목소리도 작고 힘이 없고 완전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의 식물성 인간인 듯 보였는데
인터뷰애서 이 소설이 지금의.한강에게는 자기 작품임에도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어둠에서 나와 밝은 것, 빛나는 것을 지금은 보고 있다고.
그리고 이 영혜의 도덕적 감수성이 소년이 온다와 그 이후의 소설과 닿아있는 지점이라고.
채식주의자는 패미니즘 소설로 써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 없던 영혜가 채식주의를 주장하면서 서서히 표면에 드러나는 억압적 부부 관계의 문제들이.나타나는 방향으로.
그저 무채색으로 식구들에 맞춰져 살아가다가 채식이라는 단 한가지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일을 시작하자 아주 서서히 균열이 생기는 설정.
처음 도입부를 읽었을때는 그렇게 소설이 흐를 즐 알았던지라.
한강 작가님 하나 써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