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며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렘브란트의 그림 한 점을 보고 책 한권을 써낼수 있을 정도로 깊이 묵상하고 고민하며 그 그림의 가치와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는 헨리 나우웬의 모습을 보며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인가 싶었다. 한 페이지의 감상도 풀어내기 어려운 나같은 범인이 보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천재의 작품을 또하나의 천재가 알아보는 천재들끼리의 교감을 보는 듯 했다.
책 내용에서 탕자의 귀환을 맞아주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한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우리가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며 남을 impress하기 위한 노력을 해오며 살아 왔다는 부분과 그것에 상관없이 나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부분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들어 그 하나님의 acceptance를 가끔씩 느끼며 그걸 느낄 때마다 내 주변을 감싸는 온화한 기분과 그런 상태에서는 세상과 내주변을 여유를 갖고 보게 되며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 secure한 느낌이 적을 때 사람들은 공격적이 되기도하고 complainer가 되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받고 그 한마디 말에 자신이 지배 받도록 내어 놓기도 한다.큰아들에게 부족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다. 아버지가 unfair하다고 느꼈고 분노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결심했을 때 완전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나마 드디어 깨달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편안해지면 그 누구라도 크게 내게 영향을 주지 못함을 경험한다. 그 사람의 평가와 말들이 별 상관없으므로.... 어느 목사님이신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님을 묵상한 다윗과 다윗을 묵상한 사울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이 관계의 역학을 잘 설명해주는 것같다. 백성들이 따르는 다윗을 시기했던 사울은 다윗때문에 심히 괴로웠고 병에 시달릴 지경이었지만 하나님과 secure한 관계가 있었던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보내는 여유가 있었다.
이러한 security 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느낄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인 듯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미지를 지상의 관계에서 어렴풋 하게라도 경험할때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더 깊어지는 것같다. 이걸 느끼다보니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secure 한 느낌을 주고 있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탕자 같고, 큰 아들 같고, 구경꾼 같았던 모습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던 나우웬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 같게 되어야한다고 도전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그 품안에 돌아온 사람들은 그 신령한 젖을 먹으며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랄 일이라고 크리스챠너티에 도전한다. 가정에서 부모로서, 교회 공동체에서 내게 주어진 직무에 맞게, 램브란트의 그림의 아버지의 모습으로까지 자라라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신부로서 실제로 파더라고 불림을 받지 않았는가....
교회와 가정은 이렇게 연결고리를 갖게 되는 것같다. 교회에서의 직무는 부담스럽지만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라게 하는 좋은 훈련의 계기가 되고 그것이 가정에서의 역할에 연결되어 서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같다. 이런 모습으로의 교회에서의 직무는 바람직한 모습이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일하다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되기보다는 큰아들의 모습이 되기가 쉬운 것같다.큰 아들과 마르다의 모습이 겹쳐온다. 아버지를 오해한 채 아버지를 impress하기 위해 애쓰다가 bitter한 모습이 된....교회 안에서의 애씀과 수고가 아버지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되었다면 먼저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품안에 편안히 안겨야할 것 같다.또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둘째 아들처럼 이탈하고 싶어하고 때론 이탈과 귀환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거저 주셨다고 값싸게 남용하고 있는 내 모습도 보게 된다. 나우웬이 어렵다고 고백했듯이 구경꾼이나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까지는 되겠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진짜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이상 그길을 외면 할 수도 없을 것같다. 그리고 그길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일어나는 길이요 크리스챠너티의 진정한 축복의 길임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
교회와 가정은 이렇게 연결고리를 갖게 되는 것같다. 교회에서의 직무는 부담스럽지만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라게 하는 좋은 훈련의 계기가 되고 그것이 가정에서의 역할에 연결되어 서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같다. 이런 모습으로의 교회에서의 직무는 바람직한 모습이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일하다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되기보다는 큰아들의 모습이 되기가 쉬운 것같다.큰 아들과 마르다의 모습이 겹쳐온다. 아버지를 오해한 채 아버지를 impress하기 위해 애쓰다가 bitter한 모습이 된....교회 안에서의 애씀과 수고가 아버지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되었다면 먼저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품안에 편안히 안겨야할 것 같다.또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둘째 아들처럼 이탈하고 싶어하고 때론 이탈과 귀환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거저 주셨다고 값싸게 남용하고 있는 내 모습도 보게 된다. 나우웬이 어렵다고 고백했듯이 구경꾼이나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까지는 되겠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진짜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이상 그길을 외면 할 수도 없을 것같다. 그리고 그길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일어나는 길이요 크리스챠너티의 진정한 축복의 길임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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