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4일 목요일

책 읽기 : 팟빵 : 권여선 작가의 이모 : 자가 격리 생활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

팟케스트를 요즘 들어 듣기 시작했다.
이제야 듣기 시작했으니 많이 시대에 뒤떨어졌다.
팟빵 앱을 다운받아서 도서 카타고리에 들어가니 책 읽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좀 진작부터 시작했더라면 책을 참 많이 읽고 여러 분야의 상식도 넓어졌을텐데... 아쉽다.

많은 책 읽어주는 사람중, 작가 김영하는 알쓸신잡으로 익숙해 있고 얼마 전 그의 책, 여행의 이유를 읽은 터라 김영하 작가가 읽어주는 단편집들을 듣게 되었다.
자기 책 뿐 아니라 다른 작가의 책을 읽고 뒷배경을 설명해주고 본인이 느낀 점을 가미하고 또 음악까지 깔아주기도해서 그냥 책읽는거 보다 이해하기도 쉽고 재밌다.
요즘은 점심 준비할 때나 저녁 준비할 때 블루투스로 연결해 놓고 한편씩 듣곤 한다.
5개 정도 들었는데 그 중 인상적인 작품, 이모.

이모는 사실은 일인칭 나의 시이모인데 그냥 이모라고 부른다. 결혼할 때는 그 존재를 몰랐고 결혼 하고 나서 췌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이모를 병문안 가면서 존재를 알게된 인물이다.
일인칭 '나'는 작가 지망생이고 한때 글을 쓰고 싶어했던 이모는 퇴원 후 집으로 나를 초대하고 일주일에 한번 정기적으로 만나며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데....
맏딸로 태어나 대학 일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홍보실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며 여동생과 남동생을 서포트 했던 이모. 
남동생이 빚으로 감옥에 가게 되자 그 빚을 갚느라 모아놓은 돈을 다 쓰고  병아리색 사랑을 나눴던 학자타입의 사람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친정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며 청춘을 바치며 살다가 40 줄을 넘고....그럼에도 도박빚인지 사업빚인지 모를 남동생의 굴레는 계속되고....
여기까지는 이런 얘기는 실생활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고 별스럽지 않은데  그 다음의 스토리가 이 단편 소설을  흥미롭게 한다. 
나이 50에 동생 빚에 얽혀 신용불량자가 되어 임시직으로 출판사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자 이모는 더이상 돈을 식구들에게 내놓지 않는다. 5년을 악착같이 모아 1억 5천을 마련하고는  또 다시 동생 빚을 감당해야하는  상황이 터지자 이 여인은 집을 나와 집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는 삶을 택한다. 
남아 있는 생이나마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신만 책임지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 
모든 사람과의 인연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10평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모은 돈을 쓰면서 철저히 혼자 고립되어 살아간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천륜과의 인연을 끊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고 그녀는 말한다. 얼리 어답터라 그 나이에 컴터와 SNS의 쇼셜 라이프를 영위할 줄 알았던 그녀는 자기가 만든 인연의 세계, 그것마저도 끊어버리고 티비도 전화도 인터넷도 없이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으며 정말 완전한 자가격리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는 보증금 1억 아파트를 구하고 5천만원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버틸때까지 살아보리라 생각하는데 그녀가  한달에 쓰는 생활비는 65만원 .(함 계산해보았다. 65만원 한달 생활비면 오천만원으로 6년여 버틸수 있다.)
30만원이 아파트 월세로 들어간다. 나머지 35만원이니 하루에 만원 꼴을 쓰는데 건강보험, 휴지, 비누등의 필수품 구입등에 오천원이 쓰이는 셈이고 하루 생활비는 5천원.
자기 만의 삶을 살아보리라 하지만 벌써 할머니 소리를 듣는 55세의 그녀. 처음엔 자기에게 주어진 나날들을 과거에 대한 생각 속에 자꾸 빠져들며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동네 시민센터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그녀는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도서관이 휴관하는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을 아주 규칙적으로 도서관에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컴터는 혹시 필요하면 도서관 걸 이용하고....

그녀가 또하나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는 것은 저녁식사.
작은 양을 먹지만 정성을 다해 아트를 하듯 맛나게 차려 먹는다.
메뉴는 시레기국, 말린 생선 등 조촐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차려주는 유일한 호사.
그렇게 2년 살다가 췌장암에 걸리는 것이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이 책을 보니 느낌이 다르다.
요즘 나도 집에만 있다보니 먹는 것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고 그냥 때우고 영양 보충하고 배부르면 된다였던 입장이 좀 바뀌는 느낌이다,
맛을 궁금해하며 명이나물을 오더하지를 않나 이런 저런 레서피를 보고 따라하지를 않나.
아직 요리 장인들의 그 경지로의 시간 투자와 에너지 투자를 해볼 생각은 전혀 없지만 먹는 것과 맛있게 잘 먹는거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다.
어디서 산 어떤 브랜드가 맛나다. 이정도의 관심은 가져지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저녁식사에 시간 투자를 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공감이 된다.
인간에게 남는 마지막 관심사 일 거같다.

그리고 책읽기
가장 돈 안들고 시간 보낼 수 있는 방법이겠다. 주변에 도서관이 있기만 하다면...
노후에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다면 이 여인의 생활 방식을 도입해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착취했다.
그러나 책과의 만남은 그녀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시간이 흘러가게 해준다.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친구로 사람대신 책을 선택한 그녀.
가장 적은 돈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고립된 삶은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인가 싶고 싸한 메세지를 준다.


이모는 대충 나와 연대가 엇비슷하지 않나싶다. 천리안 사이월드 페이스북까지를 접하던....난 미국에 있다보니 못했지만...
얼마 멀지 않은 그 시대,  대부분의 집의 분위기는 여자가 희생하고 남자를 뒷바라지해야했었다.
이모도 상당히 똑똑하고 능력도 있었던 여자였건만 그녀의 삶은 아주 짧게 간단하게 정리되어 마지막을 맞았다.
그녀의 삶의 색이 너무나 무채색이고 침울하고 억울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와 그녀를 둘어싼 사회의 가치관의 체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나 막판에 박차고 나와 자기 삶을 찾고자하는 용기를 갖고 있었던 단단한 심성 또한 있었던 여인인데 여자를 착취하는 남존여비적 유교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약성경, 바울이 말했던, 남자나 여자나 다 같다고 한 그 주장을 젊은 날의 이모가 들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이 여자의 선택이 달라졌을텐데...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 기독교 안에 단단히 들어와 있는 유교적인 면 때문데 별 차이 없었을까?
(이런 책을 읽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생각할 만큼 너무 내 생각의 틀이 좁아지고 있나도 싶지만 사실 그럴 수 있을 떄까지 책읽기를 기다렸다. 지나친 자유분망한 생각들이 나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내 것으로 자리잡는데 방해가 될거 같아서 꽤 오랫동안 책읽기를 멈추었었다.)

또 드는 생각은 사람이 사람에게 무엇일까?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요즘, 누구나 다 이 여인처럼 좋든 싫든 자가격리의 삶으로, 쇼셜이 단절되는 삶으로 들어왔는데 나에게도 내게 사람은 무엇일까? 물어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도 착취를 느꼈던 그녀. 그녀 몰래 남동생 빚을 지우고 그녀를 신용불량자를 만들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하긴 한걸까?
그녀의 여동생은 그녀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공부를 할 수 있었음에도 아들의 결혼 때 이모를 식구에서 조차 제외하여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이모가  싸늘하게 단칼에 관계 단절을 시작했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모를 착취하기만 했지 이모를 생각해주고 제대로된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단절은 그들이 시작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이모는 젊음을 바쳐, 인생을 바쳐 천륜의 그 관계에 헌신했었는데.....


코로나로  집콕하면서 나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이전의 분주했던 나날들을, 관계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모처럼 착취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착취와 억압은 아니지만 거래였던 관계는 없었나도 생각해보는데..... 그보다는 낭비되고 소비되는 시간, 물자, 관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이 단순하고 깔끔한 생활을 강제로 하다보니 그동안 과한 소비와 방향없이 보낸 시간들이 많았다는 느낌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거래와 착취와 억압을 느낀다면 그런 관계는 고통을 불러올 뿐이다. 다시 돌이켜보니 결혼 초 나도 결혼의 고전적인 남녀관계의 모습이 착취와 억압이라, 불공정하다 느껴졌던 시절도 있었다. 친정에서도 그러했고...시절이 그러했다. 그 시절 안에서 자란 남녀가 만났고 그 시대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 세월이었다.

이제 그 시절은 어찌 어찌 지나갔고 효과적으로 짐을 나눠지며 가정이라는 큰 그림을 같이 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만은 서로 사랑 하며 서로가 상호 희생하며 아끼며 살아가야한다는 대전제.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걸 표현하며 때로 섭섭해하고 충돌이 생기고 하지만 그 대전제만은 동의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웃에게로 확장되어야하고....
또 기독교적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주어진 존재임을 잊지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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