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흑사병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루터는 동생 둘을 흑사병으로 잃었고, 1527년경 또다시 흑사병이 발병하여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고합니다. 이 떄 사람들은 흑사병을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라 여기며, 도망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합니다.
그에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소책자를 출판했고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만일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하신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피하는 게 왜 믿음이 없어보이는 걸까?
광화문 집회라니 어이가 없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전염병때 크리스찬 숫자는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픈 병자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크리스찬들의 모습이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반대 얘기, 사회악이라는 말만 많이 듣는 듯하네요.
빛과 소금으로 복음을 전하기는 커녕 방역 테러를 가하고 전염병을 전하고....안타깝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는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비좁은 교회 공간에서 거리두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교회렌트를 중단하고 렌트비를 절약해서 교회 운영비를 줄이고 그 돈으로 5달~10달간 코로나로 인해 어려워진 교우님들 가정을 돕기로 했다고합니다. 예배는 온라인으로 각가정에서 계속 드리고....이런 모습이 지혜로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싶어요.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였으니 여러 모양으로 모이는 방법을 도모하면서 안전하게 모이기에 힘쓰면서 이 어려운 시기에 힘든 형제와 이웃을 돕고...
다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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