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9일 화요일

변증법적 신학의 Abda Murray


인터네셔널 학생들을 돕는 기독교 단체 펀드레이징 행사에서 스피커로 나온 분, Abda Murray 

그의 스피치의 제목은  the 100 foot journey and 1000 mile walk

안되는 영어로 듣는데도 재밌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대학 캠퍼스의 똑똑한 학생들은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여러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찾으며 머리가 일단 해결이 되어야 가슴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런 학생들에게 변증법적인 질문과 답을 던지는 스피커 중 한분이시다.

예전의 학생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하나님이 있나? 기독교는 진리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요즘 학생들은 기독교는 도덕적인 종교인가? 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의 침탈이 이루어지고 인종차별, 젠다이슈등에 아무 답을 주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도 있으니 이런 질문들을 받는 것.

이 분이 곧 출판하는 책 제목이 백인 남성 위주의 기독교에 문제 제기를 하는  책인듯 하고 ( 제목이 beyond white male christianity 인가 그러함)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에 기독교적인 답을 주고자 얘기를 풀어간다.

제국주의저인 침탈의 현장에 기독교의 탈을 쓴 사람들이 앞장섰던 부분에 대해, 그 피해를 직접 당한 사람들에게 그분들이 예수님을 진정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스피커가 던지는 비유적 설명은

어떤 사람이 집에 들어와 강도짓을 했는데 그 강도와 같은 코트와 모자를 입었고 비슷한 체격을 가진 사람을 보고 똑같은 강도라고 징벌 할 수 있나 묻는다.

이 부분, 요즘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상 과연 기독교의 바른 모습을 제대로 알고 그대로 실천하여 진정한 구원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될것인가? 그 사람들 말고 그 이름으로 자기 배를 불리고 강도짓을 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바른 기독교를 알고 믿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옷을 입고 이단인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끊임 없이 경고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종교인들에 대해여도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은 내걸고 있으나 그 내용은 너무나 아닌 그런 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찬을 만나고 그런 가르침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스피커의 연설로 돌아가서 강도맞은 사람이 너도 강도와 비슷한 걸 얘기하는데...라고 생각하고 거부할 떄 그 마음을 바꾸는 방법은 예수 사랑을 보여주고 함께 해 주는 것. 1000마일을 함꼐 걷는다 생각하고 함께 해주는 거. 그렇게 제대로된 코트와 모자를 입고 보여주라고.... 이부분을 설명하며 영화, the 100 foot journey 를 도입하는데 인디아에서 음식점을 하던 페밀리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1000마일 넘어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시골 마을에 정착하여 음식점을 차리지만 더 큰 도전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100 foot 거리 길건너편에  있는 프랑스요리 식당 주인과의 충돌과 갈등..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몰이해와 충돌의 극복이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어려웠던 것.

다음으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성차별, 인종차별등의 문제가 성경이 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부추키는 듯한 부분에 대하여 성경  3부분을 펼쳐서 예수님이 이 부분에서 앞서가는 분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먼저 마리아와 마르다.

마르다는 고전적인 여자의 역할, 그 영역, 부엌에서 손님 접대하고 일하는 부분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말씀을 들으며 부엌일을 거들지않는 마리아를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온 것을 칭찬하신다. 이 때 유대사회는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시켰다. 성경을 가르칠 때 남성에게만 가르쳐왔건만 예수님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그 분 주변에 모이고 가르침을 받는 것을 권장하셨고 마리아가 성경에 대해 교육 받는 것을 좋게 보시고 칭찬하신 것. 이 부분에서 스피커는 마르다는 고전적인 부분에 갖혀있었고 마리아는 새롭고 진취적인 젠다 이슈에 오픈되어 있는 인물이었다고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수긍이 가는 부분이었다. 이 분이 바울의 편지에서 많이 보이는 젠다이슈가 될 문제들을 어찌 설명할지 궁금하다.

다음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딸을 고쳐달라하자 처음에 이방인이었기에 고쳐주지 않은 부분. 그리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지 않는다고 좀 심해보이는 말씀,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말씀을 하시고 그 여인이 개도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다고 하자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부분. 이 부분은 그 앞의 문맥을 봐야한다고..

제자들에게 외모, 즉 유대인의 혈통이나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사람을 봐야하고 율법을 지키고 못 지키고가 사람을 더럽게 하느냐 깨끗게 하느냐를 결정짓지 못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이후에 일어난 일인데 이방여인이 딸을 고쳐달라 소리지르고 제자들은 돌려보내려고 하는 상황.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던진 말씀은 얘수님의 본심이 아니라 제자들의 맘 속에 있는 생각을 짐짓 나타내보이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우회적 화법을 쓰신것이라는 것.  여인은 물러나지 않았고 그 믿음을 보고 고쳐주심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라는 것. 이 해석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해석상 좀 스트레치를 많이 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선을 긋는 분은 아니신 것이 그 다음에 예를 든 사마리아여인. 이 일화는 젠다 이슈, 인종차별 이슈 모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입장을 취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

우물가의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와 그 이후 이 여인이 전도자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화는 더 설명이 필요없이 제국주의적인, 인종차별적인, 성차별적인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즘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긴 복음서와  바울등이 쓴 서신서를 좀 뗴어 내어 성경을 보고 있는데 예수님은 정말 특별하시다. 그 시대에 이런 분. 정말 쉽지 않은 일이고 자라난 시대 상황과 주변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인격이라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으시다.

바울에게서는 외람되지만 그 시대 상황의 틀을 복음으로 깨지만 온전하지는 못한 모습이 있고 사실 여자가 수건을 써야한다거나 그런 가르침들은 지금은 따르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 전 세대까지는 진취적인 답을 주었지만 지금의 시대에서 더이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답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들에 대하여 좀 위축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스피치를 들음으로 많이 회복된다. 

1000 마일 저니를 사랑으로 함께 하는  right coat 를 입어라가  그의 맺음말이었다. 

그는 중동계 미국인.

인터네셔날 학생들을 돌보는 단체의 펀드레이징을 위하여 모인 다수의 백인들 앞에서 이런 스피치를 하며 서로 모습은 달라도 예수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꿈꾸는 모습들이 참 아름다웠다. 다른 어느 곳에서 이런 갈라짐이 아닌 연합의 모슴을 볼수 있을까.

사랑은 불변의 진리고 사랑의 촤고봉은 예수님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 대신 죽으산 그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 사랑을 사모하며 모인 이런 자리가 참 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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