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0일 수요일

책 읽기 : 내가 사랑한 화가들 정우철저

이 책은 전시해설가인 저자가 11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책.
11명을 고른 기준은 삶의 어려움을 겪고 고난 가운데 그림으로 인생을 승화시켜나간 화가들. 
팬데믹 시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고.
11명의 삶을 들여다보며 어찌 이리 다 힘든 삶을 살았을까 했는데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
또 저자의 의도대로 그들의 삶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화가들이 남긴 그림 뿐아니라 말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림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돠고

1.  마르크 샤갈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 두번의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을 겪었건만 그의 작품은 사랑이 가득.
연인 벨라는 부유한 상인의 딸.
성공하여 그녀와 결혼하려는 일념으로 파리에 가서 성공을 거두고 러시아로 돌아와 벨라와 결혼 (1915년)
생일, 도시 위에서. 두 작품 모두 날라다니는 샤갈과 벨라를 표현. 둥둥 떠다니느거 같은 행복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파리에 살던 부부는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고 전쟁이 끝난 소식을 듣고 돌아갈 꿈이 부풀었지만 벨라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고만다.(1944년) 벨라 화고록 중 샤갈의 글
' 유대 예술의 뮤즈, 내 사랑 벨라.
그대는 시상을 떠났지만 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
넘 낭만적이다.
프랑스로 온 샤갈은 40년간 작품 활동을 하다가 98세에 죽음.
"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아한다."

2. 앙리 마티스

"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평화와 고요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변호사였다가 20살이 넘어 그림을 시작.
"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주었던" 아마추어 화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아내 아멜리 파레이르는 어러운 살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야수파 작품으로 엄청난 화제가 된 모자를 쓴 여인의 모델. 고통스러울만큼 현란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음.
자유로운 색채에 대한 마티스의 말은
"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러 하지 않았고 그저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기를 바랐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  
삶의 기쁨 작품은 그 특징이 잘 나타난다. 필라딜피아 미술관에 있다는디 언젠가 꼭 보고 싶다. 색채가 아름답고 즐거움과 평온함이 느껴지는 그림.
은 4가지 색만 사용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살려낸다.
1914년 1차 대전 이후 한동안 풍부한 색과 삶의 기쁨을 빼앗겼다가 다시 화복되지만 
1941년 십이지장암을 선고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두번의 폐색전증으로 건강은 나빠진다
더이상 붓을 들 수 없었던 그는 가위로 종이를 오러 폴리네시아 바다, 폴리네시아 하늘 과 같은 작춤을 만들었다.
300마리가 넘는 새를 키우고 하나의 형태를 위해 200번 넘기 작업을 하여 단순화된 형태 속에 울동감, 리듬감을 담아냈다.
생의 마지막엔 로사리오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한다. 그가 남긴 말.
" 일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 

3. 모딜리아니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파산한 가정에 태어나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고 엄마의 사랑으로 그림을 시작. 청년시절 파리 몽마르트로 가서 그림을 배움.
피카소, 르느와르와 친해지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명성을 얻을 기회들이 있었으나 엉뚱하고 삐딱한 성격으로 기회들을 놓친다.
이후 그림보다는 조각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맘에 안드는 작품은 리보르노 작업실 근처 운하에 던졌다는 소문이 있어 지금도 그곳을 찾아보라는 조크가 있다고.
건강 악화로 다시 화화로 돌아오고 1917년 화가 잔 이뷔티른을 만나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눈동자가 없는 잔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 이유는
"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겠다" 고.
화가들은 시인이기도 한 듯.
첫 전시회의 누워있는 나부 작품이 음란하다고 감옥에 갖히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의 어러움은 계속되고 전징으로 니스로 피난가서 딸을 낳는데 이들은 가난 속이서도 행복했다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1918년 잔의 초상화를 또 그리는데 이번에는 눈동자가 있었고 잔은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들은 결국 성공을 경럼하지 못하고 모딜리아니는 결핵이 악화되어 2020년에 죽고 잔은 그의 뒤를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안타깝게도 그 무렵 런던과 뉴욕에서는 독특한 분위기의 초상화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참  아쉽다.

4. 알폰스 무하
체코ㅠ동부 모라비아에서 태어남. 독실한 카톨리구신자인 학식 높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노래를 잘했으나 변성기가 오면서 그림으로 방향전환. 27살,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러 파리에 와서 3년을 머물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인쇄소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베르나르라는 연극배우의 초상을 그린 포스터를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타로 카드에 그려진거 같은 스타일의 그림.
" 가난한 사람들도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는 슬로건을 갖고 있었다고.
사계, 백합의 성모 마리아 등 이름다운 작품을 그리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50대에 이르자 상업적 성공에 회의를 느끼고 민족을 위한 작품을 하기 시작한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을 완성할때는 70대 노인이 된다.
"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한 국가와 국민이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에서 시작해 계속해서 유기적인 성장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기억해야한다. 억사를 몰라서는 안 된다." 요즘의 한일 상황에서 기억해야할 말이 아닐까.
체코 음악의 판테온 도 이런 맥락의 작품
 젊은 시절의 예므고 화려했던 상업미술과는 전혀 다른 그림들이다.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는 나치로 인해 핍박받고 79세의 나이로 죽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나치의 협박이도 불구하고 10만명의 슬라브인들이 모어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5. 프리다 칼로
다른 어떤 화가의 삶보다 처절했으나 삶의 기개는 가장 드넢았던 그녀.
다리가 잘릴 때 한 말.
"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두 발이 왜 팔요하겠어."
고통 속 그녀가 남긴 말이기에 최고의 인생에 대한 찬사일 수 있는 말.
" 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

6. 구스타프 클림트
파리가 아닌 오스트리아 빈에서만 활동한 화가.
가난했기이 성공을 꿈꾸며 장식미술을 시작하여 벽화를 그림.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아버지 동생 이 죽자 회의를 느끼고 세상의 요구보다 자신의 예술에 충실하고자한다. 빈분리파 탄생.
종합이술을 추구함. 
이탈리아 라벤나 성당들의 6세기 모자이크 작품이서 영감을 받아 금빛 장식 표현법을 창안.
대표작 키스 탄생.
키스의 여인은 예술적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 그녀는 조카의 이모. 그녀에게 4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고. 여름마다 찾아간 아터호수는 그들의 진정한 휴식처.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작품의 1/4이 풍경화다.  정사각형에 그린 아터호수 는 평온하다. 
후반기 파리로 가서 다른 화가의 영향을 받으며 남긴 작품이 삶과 죽음

7. 툴루즈 로트레크
귀족 가문에 태어났으나 제산 보호를 위해 가족끼리만 결혼하면서 장애인으로 태어남. 뼈가 약해 키가 크지 않고 지팡이를 이용해야했음. 
그림공부를 고흐랑 같이 하고 드가를 스승으로 하여 배움.
무랑루즈에 살다시피하며 최하층민의 생활을 그림. 포스터 작가로도 유명.
30대 이후 장신병에 걸려 병원에 갖히나 10년전 일을 기억하고 그림 36장을 그려 퇴원하며
" 나는 드로잉으로 자유를 샀어." 라고 말한다.
톼원 후 2년 만에하반신 마비가 오고 화실에서 마지막으로 작품들을 다 완성하고 뇌졸증으로 쓰러져 반산 불수가 된다.
평생 그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아들을 집으로 데러가 돌보고 어머니는 작품을 모두 고향  알비에에 기증.
1922년 알비에 툴루즈 롵.레크 미술관이 지어짐.
" 그는 장애가 있었지만 물랭루즈의 작은 거인이었다" 고 사람들은 말했다.
거장이 남긴말 " 인간은  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8. 케테 콜비츠
"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 이라며 치열한 현실을 담아낸 작가. 본인 자신은 교육을 받고 형편도 좋았지만 이름다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피폐한 노동자들의 생활을 담아냄. 독일에서 활동함. 독일 판화의 선두주자가 됨. 의사인 남편과 안정된 생활을 하였으나 1 ㅏ 대전때 18살 아들이 참전하여 전사함. 이에 나치에 맞서 반전 운동을 함.
독일 아이들이 굶고 있다. 작품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인플리이선으로 굶을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 
반전운동이도 2차대전은 일어났고 손자가 참전하여 전사함.마지막 판화 작품이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종전되기 2주 전에 77새로 시상을 떠남.
그녀가 남긴 말
" 나는 이 시대에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덕 책임과 역할을 다라고 싶다."

9. 폴 고갱
파리이서 태어났으나 정부 비판 기사를 쓰던 아부지에 의해 페루로 이주하는데 배에서 아버지 사망.
4년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옴.
17살부터 해군으로 전세계를 누비다가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7년만에 프랑스로 돌아옴.
엄마가 남긴 후견인 도움으로 주식을 투자해 부자가 돠고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 
고갱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인상파 카미유 피사로에게서 배우며 주말 화가가 됨.
갑작스런 겅기 침체로 증권시장이 붕괴되자 전업 화가가 됨 이때 35세.
그림의 혁신을 위해 뜨거운 애양아래 원시 문명의 에너지와 강럴한 색상을 꿈꾸며 퐁타방으로 감.또 세잔의 영향으로 주관적 관점을 중시
"그동안의 색은 모두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비다는 파란색, 나무는 갈색, 누가 이게 정답이라고 정한 거죠? 화가는 자신이 느끼는 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새로운 기법으로 8회 인상주의전에 화려하게 나타나고 싶었으나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이 큰 주목을 받게 되어 대실망을 하게 된다.
이때 고호의 동생 테오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서 아를에 가서 형 고흐와 같이 지니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둘은 같이 지내지만 서로 맞지 않았다.
고흐가 귀를 자르자 헤어지고 파리에 들렀다가 기금을 마련하여 타히티 섬으로 간다.
여인들을 그려 파리로 돌아와 전시회를 열지만 폭망. 아내는 이혼통보. 타히티에서 데려온 여인, 안나를 불량배로 부터 지키려다 다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안나는 그림과 귀금속을  다 가저가고 도망. 연이은 불행에 고갱은 타히티로 돌아가 아끼던 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돠고 절망하며 독약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림. 이 그림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그림을 파리로 부치고 독약을 먹지만 과다복용으로 다 토하고 살아남.
그런데 이 그림이 대박이 남.
파리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후원자는 당신은 타히티의 신비한 화가로 알러져 있으니 타히티에 당분간 있으라고 충고.
고갱은 타히티에서 살고 싶어하지는 않았던 인물이건만  이런 사연으로 타히티에서 심장발작으로 죽음. 후원자에기 보낸 마지막 편지글
" 나의 능력으로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는 거장  마티스. 삭을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달과 6팬스는 고갱의 삶을 담은 소설. 달은 이상. 6팬스는 현실.

10. 베르나르 뷔페
28살에 백만장자가 되는 인기 작가.
직선을 이용한 그림을 그린 구상화가.
1928년 파리에서 태어남. 엄마의 사랑으로 미슬 시작. 15살 어린 나이에 거장들을 배출한 미술학교 입학. 그러나 가난하여 미술재료를 사기도 어러웠다고 한다. 초기 작춤인 스크레치가 많은데 그림을 그릴때 가장 행복했음이도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스트레스를 수많은 스크레치로 풀었다고.
1944년에는 마사일로 수백명이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1945년에는 엄마가 돌아가심.그리하여 와로움을 견디며 살기 의해 그림을 그림.
직선을 이용한 건조한 그림들은 시대감각, 시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첫 전시회 후 "20세기의 증인"이란 별명이 붙음. 또 ' 구상의 왕자' 라는 별명 또한 붙음.  이후 고공행진.
와인 한잔 그리고 여인 은 그의 가장 우명하누작품 중 하나. 전후 예술가 10인 증 1위, 패블러스 영 5에 사강, 이브 생 로랑과 함께 이름을 올림.
영 앤 리치 앤 핸섬 이었던 것.

백만장자가 된 그는 이릴적 꿈이었던 성에 살아보고자 성 하나를 구입하여 살면서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닌다.
그는 첫눈에 반한 아나벨, 가수로 활동하는 연예인이었던 여인과 결혼하여 평생을 사랑한다. 연애기간엔 100킬로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왕복하며 사랑을 나누었다고.
 1950년 잘정이었던 그의 명성은 1960년부터 추락. 평론가들의 미움을 받음. 
이때 뉴욕으로 옮겨지는 예술의 중심지에 위기감을 느낀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 추상화가들을 홍보하면서 " 위대한 예술은 더 이상 구상적이지 않다" 라고 뷔페를 저격.
구상화를 고집했던 뷔페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이에 대해 그의 말
" 원래 모든 그림은 추상적입니다. 구상화가 이하하기 쉽다해도 관객이 림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멋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요. 그
런 의미에서 추상화, 구상화를 떠나 머든 예술은 추상적입니다."
그런 혼란의 60년대를 지나고 70년에는 최고 명예 훈장을 받는다. 그 이후 그림은 안정작이 되고 배를 많이 그렸다.
" 나는 낣은 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작은 배와 같다. 파도는 계속해서 덮챠오고 또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 파도이 휩쓸려 때로는 부딪치고 다시 일어서면서 간신히 조종간을 잡고 있다." 
그는 비난에 대해서도 그것에 반박할 필요가 없다며, 비난이 더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시켜주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부터 성 안이 틀어박려 그림만 그림. 파킨슨 병과 팔목골절로 더이상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지자 1999년 10월 4일ㅅ스로ㅠ목숨을 끊는다.
하루 10시간씩 그림을 그렸던 그는 평생 8000점의 그림을 남겼다.

11. 에곤 실레
28살에 요절한 나르시스트.
성병으로 죽은 아버지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겨 여동생의 누드화를 그리는 등 보편적 도덕관념이랑 동떨어진 면모가 있었다.
빈 분리파에 들어가 실레 17살 , 클림트 45살의 나이 차이에도 클림트는 실래의 그림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며 스승이 아닌 친구로 지내기로 함.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당시 위선적이던 상류층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림.
클림트가 소개하준 모델 발리와 사랑에 빠져 발리의 초상 작품을 그림. 이 그림은 그의 자화상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과 세트 느낌.
아름답지 않은 독특한 누드화는 인기를 끌지 못하고 어린 아이들 누드를 그린다는 누명으로 감옥에 가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4년간의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고 증산층 여자,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해 안정된 생활을 꿈꾼다.  결혼 후 나흘만에 군대에 징집되었으나 에디트에 의해 안정을 찾고 그림의.인물도 안정적이 돠어간다.
1918년 빈 분리파 전시이서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고 행벅한 날을 맞으나 스페인 독감으로 에디트가 죽고 3일 후 그도 독감이 걸려 사망.
평갱 예술이냐 외설이냐 논쟁으로 시달렸던 그가 남긴 말
" 예술가를 억압하는 것은 범죄다. 이러한 행위는 태어나는 생명을 생명을 즉이는 것과 같다."

11명의 화가. 대체로 아버지 보다는 엄마가 믾은 사랑을 주었다. 
죽을 듯한 괴로움 속에 명작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고 
그림으로 정신병이 아님을 증명하고, 그림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그림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삶과 죽음과 역사와 현실과 꿈을 담아낸다. 그런데 그걸 아름답게, 조화롭게, 또 때로 충격적으로 담아낸 그런 이야기들, 작품들.

샤갈의 작품이 젤 궁금하다. 그 둥둥 떠다니는 연인들을 보면 내 마음도 풍선을 달거 같다.






댓글 2개:

  1. 8번만 처음듣는화가네 역경을이겨내야 경지에이르는듯~예술가들 피는 다른것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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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중 미술가 같았어요.그림들 느낌이. 역시나 많이 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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