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매체의 지난 1000년 동안 세계를 빛낸 위인선정에 항상 상위권에 오르는 루터. 3위에 오른 적도 있다고하니 일생을 알아볼만한 위인이다.
루터의 업적은 '인간이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는.것. 교회와 사제라는 제도 없이 직접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오작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 그의 종교개혁모토였다.
이.책은 루터의 유적을 따라 사진까지 곁들어주면서 친근하고 부담없는 필체로 쉽게 그의 사상과 인생을 따라가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어러운 사상분석적 접근 책 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했다.
또 당시 유럽의 배경을 잘 모르는 나같은 독자를 위하여 설명도 곁들여서 사전 지식 없는 사람이 읽기 편했다.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만스펠트애서 보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라는 차로 30분 정도.
루터가 살던 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페스트가 유럽인구의 1/3을 앗아갔고 사제들도 많이 희생되어 부족했고 무자격자들이 교화로 파송되어 한 사제가 다수의 교회를 맡기도 했다. 교회 권력의 부패도 심하여 그 무렵 우럽교회는 매우 어렵고 힘들었다.
또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 전쟁등 전쟁 또한 끊이지 않았다.
교황권이 프랑스 왕권에 굴복한 아비뇽유수(1309~1377) 로 상처입은 카톨릭 교회는 15세기에는 3명의 교황이 난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들간 주도권 싸움은 교회의 타락을 부채질 했다. 메디치 가문의.레오 10세는 13살에 추기경이 되었다고하니 자격이 있었을까 싶다. 이탈리아 트렌토 지역은 성직자의 1/5이 정부를 두고 있었다고.
이런 상황에서 교회 밖에서 구원을 찾는 이들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 희생되었다. 성인 숭배 강화도 시작되었는데 이는 민중종교를 교회 안에 붙들어두려는 방편이었다.
당시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독일어권 6만명에 이르렀고 유럽 전체로는 10만영었다고.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루터는 15살에 아리제니흐로 와서 3년간 공부하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운다.
1501년에는.대학생이 되어 에르푸르트에 와서 10년을 살았다
이 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의 성서를 보았다.
당시 성서 한권을 사려면 노동자가 10년간 돈 한푼 안쓰고 모아야하는 금액이었다. 양 250~300마리가 필요했다.
또 근교 슈토테른하임에서 천둥과 번개 속에 사제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다.
당시 루터는 시대적 상황 속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구원을 갈망하며 진지한 고민을 하던 터였다.
1505년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에 입회허여 성경을 연구하면서 엄격한 규칙 속에 욕망을 끊고 신과의 만남을 갈구했다.그러나 그의 실존적 불안은 가셔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507년 사제가 된다. 사제가 된 이후 첫미사를 집전할 때 빵과 포도주가 자신에 의해 더렵혀질까 두려워 만지지를 못했다고 한다. 사제가 된 루터는 신학 교육을 받았다. 당시 신학교욱 은 그 이전에 문법 수사학 토론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폭넓은 학문을 배웠고 루터는 두각을 나타냈다.
뛰어난 학생이었던 루터는 스승에 의해 1508년 비텐베르트대학에 보내진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세상학문을 연구하는 분위기였는데 구원에 목말랐던 루터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했다고.
루터는 신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라고 하며 이성보다는 믿음과 계시를 강조한 오컴의 유명론의 영향을 받았다.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신만이 할수 있다는 이 생각은 루터의 오랜 불안을 씻어주었다. 또 경건 생활로 신비한 체험을 적은 ' 한 독일인의 신학' 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의 영성 회복 운동은 밀도있는 성서 묵상을 내세웠고 개인용 성서와 묵상용 문서들이 필요해졌다. 결국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등장에 한 요인이 되었다.루터의 독일 신학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와 같은 선상의 책이다.
에르푸르트수도원시절, 루터는 대표로 로마에 가는 일이 있었는데 거룩한 도시를 꿈꾸었던 루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경험은 신앙은 신과 자신만의 문제이지 조직이나 직제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을 더 분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수도원에 머물며 " 탑에서의 체험" 이라는 신과의 만남의 기쁜 체험을 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1545년 루터가 남긴 라틴어 전집 머리말애서
" 내가 비록 신실한 수도자로서 살았지만 언제나 신 앞의 죄안으로서무거운 양심의 가책 속이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ㅜ되었고 또한 내ㅜ만족만으로 편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라고 고백한다.
바울서를 연구하면서 " 복음에는 신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이 이르게 하나니 가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를 이해하면서
전적 타락으로 더렵혀진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값없이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신의 의였음을 루터는 절감했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 와적인 의' 에서 ' 수동적 의' 로의 전환이라 부른다.
죽음의 불안이서 밧어난 루터는 오랜 방황 끝에 만난 사랑의 신을 믿고 따르며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했다.
# 고해성사에 대해: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실시되었으나 정식 교회의 성사가 되누것은 1215년이다.
초기 고해성사는 특별히 지정된 곳에서 시행되지 않았다. 처음엔 교회안에서도 밀실에서 고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1년에 1,2 회 정도 였고.
고해성사가 아니어도 면죄 되는 방법이.있었으니면죄부.
지금의 고해 성사는 종교개혁의 영향
루터는 신과 인간 사이에 사제가 개입하는 고해성사를 강력히 비판.
루터의 면절부에 항의하는 96개 논제 발표는 비텐베크에서 이루어졌다. 이 도시에서 루터는 교수가 되어 가르쳤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지금껏 잠들어 있다. 이 도시에 35년을 살았다. 그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여 성경을 잘 해석했고 그걸 독일어로 학생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했 다. 루터는.인기있는 교수였고 학교의 정원도 두배로 늘었다. 이 지역 통치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는 흡족해 했고 교황의 중앙집중을 경계 했기에 루터를 지지했다.
루터가 베텐베르크 성교회에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라틴어로 되어있었는데 몇개월 후 독일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게 되면서 파급은 걷잡을 스 없게 퍼져나갔다.
카톨릭 교회의 대처는 루터를 이단으로 모는 것. 그러나 루터의 지지층이 두꺼워 쉽지 않았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식 이성을 통해 자연 속이 스며 있는 신적본질을 발견하여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기존의 카톨릭 영광의 신학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루터의 신학은 당시의 스컬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거부하는 신비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라이프치히 논쟁등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교황은 60일이내에 취소하지않으면 파문한다는 조서를보냈으나 루터는 불 태워 버린다.
그리고 더 강력히 종교개혁 3대 문서를 내보낸다. 만인 제사장 주의를 주장하고 교황에게만 성서 해석 권한이 있음을 반박하고 공의회를 소집하고 결의하는 권한이 교황이게만 있다는 주장 을 반박한다. 또 결혼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죽은자의 미사는 폐지되야 하며 탁발 수도회의 구걸을 금지해야한다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방안을 내놓았다.
7가지 성사 중에서는 세례와 성만찬만 인정했다.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관하여'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삶을 믿음과 사랑으로 정리했다.
믿음.안에서 신자는 신의 은총으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나, 동시에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지지했는데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물 수집에 열을 올렸고 사람들은 성물이 면죄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성물을 보러 왕래가 많아지는 것은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교황청이 면발부를 발부하고 그쪽으로 돈이 흘러가게 되었기에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다.
세속 왕권과 영주들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걀국 이들의 도움으로 루터는 죽지 않을 수 있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통해 개신교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교를 정하는 권리는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 지역 영주가 정하게 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신교 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보름스 회의를 1521년에 연다. 이때 루터는 이미 파문당한 상태였는데 루터를 불러 소명의 기회를 주겠다고 하였다.
브름스로 가는 길목에는 루터를 지지하는 군중들의 환영이 넘쳤고 브름스에는 2000명이 모였다.
황제는 루터를 심문했으나 루터는 반박했고 애초에 무사 안전 귀가를 약속했기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일로 카톡릭의 공적 이단자가 된 루터는 어둠의 영역에서 언제 피살될지 모르는 위혐에 처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시켰다.
그곳에 머무는 10개월 동안 루터는 철저히.신분을 감추고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522년 9월에 출간된 9월 성서는 대성공이었고 인쇄술의 발달로 책값은 현저히 떨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1533년에는 10가구당 하나, 1546년이는 2.5 가구당 하나 이 성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번역 철학은 여자나 아이, 시장통 사람도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전에 나왔던 18종의 번역본과 구별되었다.
삽화를62점이나 넣으며 소통을 향한 집념을 보렸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글읽기와 독서 열풍을 일으켰다. 또 독일어 표준어가 이 성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루터의 본을 따라 영어 프랑스어로도 번역되면서 민족주의가 득세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인 틴들은 루터를 찾아와 성서를 영어로 반억하여 양국으로 몰래 갖고 갔으나 독일보다 카톨릭 세력이 강했던 영국이었기에 처형당하게 된다. 그의 성경은 17세기 초 킹 제임스 반억이 나올 때 모범이 된다.
루터는 교회 음악에서도 독일인이 쉽게 따라부를 노래를 만들었다.
내 주는 강한 성아요는 그가 작곡한 찬송가.
루터의 걸혼도 개혁적이다. 증세 시대에 사제와 수녀가 만나 결혼 하였으니.
평범한 수녀 생활을 하던 카타리나는 루터의 개혁 운동 소식을 들었고 동료들과 함께 수도원 탈출하기를 꿈꾸며 루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12명의 수녀는 무사히 탈출하고 그 중 9명이 루터가 머무는 도시로 온다. 그들을 차례차례 결혼시키고 남게 된 카타리나는 루터에게 자신과 결혼해 줄것을 제안한다.( 요즘 이 여인에 대해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 먼저 청혼하고 대가족과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안을 잘 꾸려가는, 그 시대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진취적 여성이라고 한다.)
루터 42살 카트리나 26살 두 사람의 결혼은 세간에 화제가 된다. 환호와 비난이 있었다. 아이가 정상적이지 않을거라 믿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증세의 성윤리는 금욕적이었고 쾌락을 위란 성행위는 속돠고 죄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당시의 철학과 사상도 마찬가지 흐름이었다. 교황 385년에 사제의 독신이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제는 여전히 아내나 연인, 자녀를 두고 있는 이중성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 라테란 공회의를 통해 엄격하게 사제의 독신을 제도화하고 이를 어기면 범죄행위로 규정되게 되었다.
수도원제도는 루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수도원 제도는 가난, 정절, 순종을 신의 은혜보다 더 따르게 한다는 점, 수도원 내부만의 인간 관계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점, 그 제도 자체가 성경의 원리가 아니라는 점등을 들어 공격했고 사제들이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을 폈다. 또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고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았다. 남녀결합을 신의 명령아요 은혜로 본 루터의 견해는 파격을 넘어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루터는 공교육에도 공런을 했다.
성서가 쉬운 민중의.엄어로 쓰여지자 누구나 읽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공교육을 실시해야했다.
루터는 개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학교와 도서관을 세웠고 여성에기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아한다며 공교육의 장을 확대했다.
일반인과 미숙한 목회자를 위한 대교리 문답서와 어린이를 의한 소교리 문답서를 만들었고 모든 도시에 학교를 세워 초등학생부터 글을 가르칠 것을 촉구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달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인데 당시 보통 책 하나를 필사하는데 두달 정도 걸렸지만 새로운 압착 인쇄기를 이용하면 1주일에 대략 500권 정도의 책을 제작할 수 있었다. 루터는 미디어 전사였는데 1523년에는 346편을 출간하는데 이는 그해 독일어 출판물의 38% 에 해당된디. 그의 글쓰기는 병중에서도 계속 되었고 그는 타고난 탁월한 글쟁이였다.
9월 성서는 85쇄를 찍고 10만부가 팔렸다.
그런데 루터는 결코 농민들 편에 서지 않았다. 주로 영주들의 힘을 빌려 개혁하려고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횡포에 분노하여 만민제사장 주의를 내세운 루터가 자기들 편이 되어줄거라 생각했지만 루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1525년 폭도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통하여 농민들과 완전 다른길을 표방했다. 제휴에게 무력으로 농민을 제압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진압군의 폭력으로 수천만 농민이 학살되었다. 농민 전쟁동안 10만명이 희생당했다.
루터의 윤리성은 헤신의 방백 필리프의 이중걸혼을 묵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색이 바래기도 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원칙을 저버린 것.
루터의 자리는 16세기 인쇄업이 꽃피던 라이프치히 라는 도시를 옆에 끼고 바티칸으로 막대한 자금이 흘러가는 것에 진저리를 치던 프리드리히 3세가 통치하고 있던 비텐베르트가 안성맞춤이었다. 다른 환경과 시대였다면 루터는 융통성없는 보수신앙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물어가는 중세의 끝자락에서 신의 은총을 받는 주체적 자아를 외친 루터가 근대를 앞당겼음을 보면사 그는 세상을 바꾼 인물로 기억될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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