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9일 목요일

책 읽기 :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1987년에 출간 되었으니 정말 오래된 책.
책 정리하다 제목이 끌려서 읽게 되었다.

삶의 체계
속된 세상과 성스러운 교회를 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의 체계를 기독교 안에서 정립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저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델란드의 개혁 주의( reformed church) 기독교인으로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기도 하고 네델란드의 수상이 되어 종교적 신념이 구현되는 국가를 꿈꾸며 정치를 하기도 한 인물. 영향력 있고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1837년 네델란드의 마스루이스에서 태어나 레이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스트의 작.마한 시골 교구교회에서 목회를 하먄서 회심하고 후에 암스텔담의 큰 개혁교회, 왕들이 대관식을 가지는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 
그는 1872년 기독교 일간지를 창간하는데 47년동안 수천편의 논설을 썼다.
1874년 목회에서 물러나 하원의원이 된다 1877년 의원직에서 물러났으나 1879년 반혁명당을 조직하는데 이는.세속 정당에서 소외된 평민 그리스도인들이 국사에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장을 만들어주었다.
1880년에 암스텔담에 "자유 대학"을 설립해서 십수년동안 교수로 가르쳤다.
1886년에는 네델란드 개혁 교회 교단을 창설했다.
1894년 다시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이후 몇년간 평민에게도 투표권을 줄것을 대변하는 운동을 했다. 1898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앙을 되짚어보는 3년간의 기간을 진 후 ( 이때 강의한 것을 이 책으로 낸 것) 1901년 수상이 되었다.1905년 근소한 표 차이로 재임되지 못하고 수상직에서 물러나 역작들을 저술하였다.
1920년 그의 열정적인 삶을 마감한다.
대략의 약력애서도 알수 있듯이 신학자 목사이면서 정치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교회에만 있지 않고 우리 삶의 전영역, 특히나 우리 삶에 영향을 세세히 미치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나타나야함을 주장하고 실천한 인물.

1. 헌대주의의 상징,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 대혁명은프랑스 국민 의회가 " 하나님도 없고 주도 없다." 라고 표방했듯이 모든 신적 권위에서 해방되는 인간의.자유를 선포한다. 하나님깨서 부르봉가의 폭정을 전복시키고 하나님의 국가를 자기의 수족처럼 남용한 군주들을 심판하셨다할지라도  혁명의 원리는 철저히 반기독교적이다.
이러한 현대주의의 거센 물결에  대항할 수 있는 기독교 원리는 칼빈주의 이다. 종교적 정치적 원리가 최고도로 발전한 형태로서 스위스, 네델란드, 영국을 개혁시켰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을 통해 기독교에 기반한 나라를 건설하게 하고 번영의 촉매 역할을 했다.( 이렇게 시민 혁명을 이룬 나라를 신적인 과점이서 보는 것은 처음 접하는지라 새롭다.)

2. 그렇다면 칼빈주의는 무엇인가?
카톨릭의 부패로 나타난 개신교 운동의 두 중심인물은 루터와 칼빈이다.
루터없이 칼빈은 있을 수 없다고 할 만치 루터의 역할은 중요했고 역사의 분깃점을 이루었다 ( 루터 책 참조) 그런데 루터의 한계는 위로부터의 개혁, 카톨릭 조직 내에서의 개혁이었다. 루터도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직접적인 교제를 주장했지만카톨릭 교회를 신과 신자 사이의 교사 정도의 권위 기관으로 두고 개혁하고자했다. 루터식 종교개혁이 일어난 나라들은 하나같이 귀족으로부터 일어났고 행정부의 세력 안에 들어갔다. 따라서 종교의 개혁이 사회 정치 문화의 전반적인 개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캘빈주의는 교회 안과 밖, 인생의 모든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쳐 독특란 인생체계를 창출했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폐기시켜버렸다. 교회의 세력을 없애 버리고 싶었던 것이 모든 종교적인 신조에 대한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이 현대주의는 독일로 넘어가 범신론, 블가지론등의 옷이 입혀지면서 삶의 국면에서 하나님을 추방했다. ( 루터가 독일사람이데...)
칼빈주의는 동시에 16세기 서유럽의 여러나라에서 발생했다. 직공, 농부, 상인, 종의 신분을 가진자들, 여자들, 하녀들 사이에서  ' 영원한 구원의 강한 확신' 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교회랑 상관없이 드러났다. 이들은 믿음을 버리라는 강한 압럭을 받게 되면 주를 부인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함을 드러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화형대에서 즉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미했다. 이 특징을 최초로 분명하게 의식하게 된 사람이 칼빈이었고 칼빈주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해석원리,  그로 인한 인생체계를 창출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 아래 피조물이고 타락란 죄인이라 보기에 누가 누구에게 주인 노릇을 못하게 되고 차별이 없게 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차이는 있지만 차별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특권적인 계급, 카스트제도, 노예제도등을 반대한다.  그런데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밑애서부터 허물어뜨렸다. 중간 노동자 계층이 더 높은 성품을 발전시킴으로써 귀족들을 격동시켰고 시민들이 근로자들을 시기하게 되었다.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하나님 앞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열심에 사로잡혀  민주주의의 터가  굳어졌다. 

3. 세상에 대한 태도
중세의 로만 카톨릭은 세상과ㅠ교회가 서로 반복하고 대치되었다. 교회는 거룩한 것, 세상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었고 전체 사회생활이 교회의 날개 그늘 아래 있으면서 악령을 추방해야한다고 보았다. 정치, 과학, 무역, 상업 모든 영역이 교회의 구속을 받았다.
칼빈주의는 세상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있다고 보았다. 구원을 이루는 특멸 은총과 자연과 세상을 유지시키는 일반 은총, 이 모두의 발전이 창조자 하나님께 드려지면서 영광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모든 분야 세상의 삶을 하나님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가정, 무역, 상업, 예술, 학문은 교회의 간섭애서 배제되었고 자기나름의 고유한 영감을 되찾고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애서 수도원으로 도피하는 대신, 세상에서, 삶의 모든 위치네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가 강조되었다. 죄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교회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죄와 시험을 이길 힘이 되어서 청교도적 절제 정신이 세상의 전체 삶의 영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주의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하나님과 인간이 사제의 중재없이 직접 소통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세상을 교회의 지배 아래 두려하지 않고 독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이 더욱 커가도록, 그 숨겨진 가능성응 개발해야한다고 믿는다.

4. 칼빈주의의 우월성
저자는 16세기의 두 사상의 흐름,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돠는 현대주의와 칼빈주의를 19세기, 3세기가 지나서 평가하면서 칼빈주의의 우월성을 역사가 증명허고 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역사교과서는 이런거 안 가르쳐 주는 듯.)
칼빈주의는 종교는 인간을 의한 축복을 산출하지만 인간을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 자신을 위하여' 피조물을 지으셨다고 본다. 또한  자연, 동물 모든 피조물에 종교적인 표현을 새겨 놓으셨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도다." " 온땅에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와 같은 표현애서 만물이 하나님을 찬미한다. 하지만 그 정점을 찍는 존재가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종교의 씨앗이 심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최고 목표, 하나임 뜻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의  영광에 몰입하는 것이 모든 참된 종교의 골수요 핵심이다. 
"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칼빈주의의.핵심인데  종교영역에서 이보다 더 높은 이상을 구현시킬 수 없다 할만치 탁월하고 우월하다.
또 인간의 지정의 전영역 중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영역을 하나님께 드려야한다고 본다. 칼빈은밀실이나 교회 속이서만 존재하는 종교를 혐오한다.하늘과 땅, 모든 백성들과 나라를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촉구한다. 인간 생활의 어떠한 영역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규례들을 지켜야하고 모든 노동이 열심있고 쉬지 않는 기도의 말로  젖어야 한다는 종교의 요구가해당되지 아니하는 곳은 없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면전에 서있는 것이다. 엄격하게 하나님께 복종해야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해야한다.
교회는 구원이라는 특별 은총을 받은 사람들로서 빛과 소금이 되어 일반은총의 역할을 해나가야한다. 이원론적인 접근을 배격하고 모든 인생이 하나되는 일원론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한다.

또 종교는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있어서 규범적일 수 없고 구원론적이어야한다.

5. 칼빈주의의 가르침
지상의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제도나 영적인 한 계층이 아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개인들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세는 민주적이고 모든 지역 교회는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
교회 생활의 원리 또한 강제적이지 않고 자유적이다.
유아세례는 세례를 통해 자녀들과 자기 교회의 교제의 끈을 연결하는 것이므로 권장된다.
예베의식은 사람을 위무해주고 얼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한다.
참된 칼빈 주의자는 규례들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사막에서 안내자를 따라가는 기꺼운 마음으로 삶의 전영역에서 규례들에 자신을 맞춘다.
원초적인 도덕법을 창조때부터 인간의 마음판에써  놓으셨고정수리만 뽑아서 요약한 것이 시내산 율법이라 여긴다.
언제 나 모든 만사에 항상 계시는 하나니께 다한 가장 깊고 가장 거룩한 경외심을 삶의 법칙으로 삼는다. 세상을 회피하는 것, 공직을 맡는 것을 정죄허고 군대를 회피하는 것은 칼빈주의 가르침이.아니다.
또 칼빈주의자는 자신을 교회 속에 가두고 세상이 제멋대로 되도록 내버랴 둘 수 없다. 낙원이었다가  저주로 망가지고 타락 이후에는 일반은총으로 지탱하는 세상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소명을 느낀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에 따르도록하고 부패가운데 발견되는 사랑스럽고 좋은 점들을 받쳐주려는 거룩한 소명을 느낀다

6. 국가와 칼빈주의
칼빈은 개인의 구원론보다는 ( 루터가 여기에 초점 맞추었음을 루터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지배원리로 삼았다.
칼빈은 인간의 죄성때문에 통치 조직이 있고 통치 권위자를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고 한다.
이 때 각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규례에 맞게 통치 되어야하고 그런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므로 복종하는 것이 하등 자신을.하락시키는.일이 아니라고 한다. 
공화제든 군주제든 귀족정치든 하나님의 은혜로다른 사람을 다스릴 권세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자기와 동등한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는 요점은 변하지 않고 선출제가 바람직한 관원 선출 방식이라 보았다.
하나님의 주권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평등성을 보장하고 선출에 의한 방식을 지지하는 이 입장대로 영국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이 만들어진 나라가 미국이다. 신을 부정한 프랑스와는 다르다. 범신론적인 독일과도 다르다.
네델란드와 영국은 칼빈주의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하나님 아래의 순종은 무서워 억지로 순종하는데에서 양심을 위해 순종하도록 끌어올린다.
또한  불의함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정의의.이름으로 저항할 불요불급의용기를 창출한다.
그 분의 의로운 법정은 압제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수의 정당성을 언제나 인정해준다.

7. 정부와 가정, 사업, 학문, 예술, 교회의 관계
정부와 사회의 여러 영역들은 독립적.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자 하나님께 복종할 뿐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각 영역에서는 개인적인 우월성으로 그 주권이 나타나고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 지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므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많은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가 참교회냐 판단하는 권위를 정부가 부여 받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 루터와 다르다.
개인의 주권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은 각자의.생활영역이서 주권자이고 그 위에 어떤 다른 자를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둔다.
이런 관점애서 본다면 교회의 주권 또한 정부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
정부가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인간 존재의가장 깊은 윤리 능력을 존중해야한다. 양심을 매장당한 시민들로 구성된 나라는 벌써 그것만으로도 국가의 힘을 상실하고 있는 셈이다.

8. 학문에 대한 자세와 일반 은총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경륜을 자연법의 기초와기원으로 본다. 이 하나님의 경륜의 질서에 대한 탐구는 격려된다. 우주가 무작위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적 계획 안에 일관성 있는 체계로 세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항상 불암감 속에 살아야할 것이다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등 복음이 가진 광범하고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칼빈은 중시했다. 창조계의.회복을 위해 자연과 우주에 대한 탐구를, 영혼구원보다 낮게 평가하지 않았다.
사실 칼빈은 16세기 제네바를 고통스럽게 했던 전염병이 도는 동안 영적 필요성 뿐아니라 위생적인 방도를 들여와 손해를 막았다.

하나님을 아는 방편은 성경과 자연이다. 성경은 자연이라는 책 속에 하나님이 손으로 쓰신 신적 사상들을 다시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저주의 결과로 원래 하나님의 손으로 써 놓은 것이 일그러졌고 성경을 통하여 다시 보게 되었다. 

모든 불신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악하고 충동적이어야할거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불신세계가 많은 면에서 더 나은 점도 있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 이방의 덕행" 이라고 불려지느누것을 만나서 때때로 얼굴을 붉혀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반은총을 통하여 죄가 득세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러나 이 은총은 죄의 핵심적인 뿌리를 제거하거나 구원하여 영생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신학이외의 다른 학문에 대하여 더 낮은 학문이라 폄하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영역 가운대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지성의.힘이 미치는 한애서 하늘에 속한 것 뿐아니라 땅에 속한 것도 재어볼 소명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는다. 자연, 인간 산업과 그 산물, 인류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반 은총을 보면서  찬미한다.

9. 진화론과 무신론에 대하여
흥미로운 주장이 있는데 이 우주가 창조된 모습에서 타락 으로 망가졌다는 것. 비정상적이라는 것.
그 전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망가진 자연을 지식적으로 접근해서 탐구하므로 종교인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 이런 생각은 처음 본다. 창조한 하나님의 법칙을 연구 이런 얘기만 들었는데.. 이 격돌이 심했던 시절이 있었나보다)

칼빈주의자들은 논쟁을 하기보다는 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세가지 사실, 죄에 대한 인식, 믿음에 대한 확실성, 성령의 증거 에 더욱 충실하고자한다. 그렇지만 학문에 대해 와면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학문적 진보에 귀기울이고 그 전제들, 사실들을 알고 있어야한다.

10. 미래에 대하여
현대주의가 더 광범위하게 진화론과 범신론등과합쳐지면서 비기독교적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대안은 결코 기독교사업이나 신비주의가 될 수 없으며 칼빈주의와 같은 기독교적 체계, 학문적 체계기 세워져애함을 강조한다.
(지금은 이 때보다 훨씬 더 심해진, 인간과 기계와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에 과연 어떠한 기독교 이론이 이 세상에 해답을 즐 수 있을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성령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순교를 택하먄서도 거부할 수 없었던 모습들,부자나 귀족들을 질투하게 만들었던 뭔가 삶의 오모한 진리를 터득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모습을 묘사한 그 부분이 가장 마음을 흔들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지 않으면 다시 그 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물은 무섭게 빠져나갈 것이리 한다. 비유적으로 에너라이언 하프를 얘기한다. 산들바람이 불면 하프가 소리를 내는데 제 위치에 놓이지 않으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하프는 영롱한 음악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언제 성령의 바람이 다시 블어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침묵의 시대인 것은 분명한 거 같다.
칼빈주의 이상은 없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우린 이 세대를  16세기 칼빈주의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우린  성경에서 어떤 보화를 끌어올려야하는걸까?
하프를 잘 다듬고 조율하여 제 위치에 갖다 놓아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삶을 꿈꾼다.

구원이냐, 우주적 주인이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구이냐. 이 두 관점의 추구점과 세상에 대한 이해 부분도 이 책이 많이 도움을 주었다.
인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 갖고 이해하며  망가진 부분을 바로 세워나가야한다고 보는 관점이 코로나 시대를 지나온 입장에서 보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망가지니 인간도 망가진다는 것이 코로나 시대의 교훈이다.
저자의 시대는 미국이 학교애서 기도를 하던 시대였다. 그 이후 미국은 많이 달라졌고 지금은 지도자에게서 신앙의 모습을 찾기는 어러운 시대이다. 특히나 세계 지도자들의 자질이 이 세상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시대에 살면서 칼빈주의적인 일반은총으로서 악을 제어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크리스찬의 모습이 절실히 필요하다 느껴진다. 골방과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세상을 바꾸는 기독교인,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 드러나게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댓글 2개:

  1. 어휴..한번 읽고
    두번 읽었는데
    더 읽어 봐야 칼빈주의를 좀 이해 할 수 있을까?

    답글삭제
    답글
    1. 칼빈의 생애를 정리한 책을 읽고 싶더라구요. 루터는 그런책을 읽으니 이해가 쉽던데 저도 이 책으론 좀 부족하다 싶더라구요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