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동역,바울의 동역

세례요한의 탄생을 보니 보통 난세에 태어나는 영웅의 신화적 탄생 요소를 골고루 갖추었음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거룩한 집안, 제사장집에서 태어난다.
이 제사장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었는데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갖게 될거라 알려주고 수태를 하게 되고 이 때 제사장인 아버지는 말을 못하게 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가 말이 터지며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붙여준다.
뭔가 탄생부터가 대단한 인물이 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범상치가 않다.
주변 사람들도 기이히 여기며 요한의 삶을 눈여겨 보았을 법하다.
그런데 정말 요한은 먹는거며 입는거 생활하는 것이 남달랐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르게 광야에서 낙타가죽 옷을 입으며 석청을 먹으며 구도자,진리를 추구하는 자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 요한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그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며 따르는 제자가 생길 수 밖에.....

예수님의 탄생은 어떠한가?
처녀가 잉태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지만 은밀하게 진행이 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지극히 평범하게 자라나신다. 30세까지 다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고 마시고 어떤 영웅적이거나 비범한 요소도 없이 자라신다.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먹고 마신다고 비판할 정도로 금식과 금욕등의 생활과는 달리 어찌 보면 범인들과 다를바 없게 생활하신다. 그리고 요한 앞에 와서 세례를 받으신다. 위대한 인물인데 탄생 신화는 은밀했고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들만 실현하시며 별난 거 없이 30살까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영웅의 요소를 두루 갖춘 요한은 어찌보면 평범해보이는 예수님을 태중에서부터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고 자신의 맡겨진 사명이 예수님을 맞기위한 터닦기 작업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동역의 시작은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정확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서는 신부되신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신부됨을 기뻐하는 친구로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기뻐했다. 물론 옥에 갖혀서는 잠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제자를 보내 물어보는 흔들림과 확인절차를 거치는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영웅 같은, 구도자 같은 요한이 평범해보이는,  엄마와 같이 혼인잔치에나 참석하는 예수님의 길을 평평히 하고 길을 닦고 씨뿌리는 작업을 잘 감당하였다.




요한의 동역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해보인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요한이 난세를 이끌어갈 영웅으로 보여지는데, 그런데 요한은 그런 자신의 주목 받는 인생이 자신의 영웅됨을 위함이 아니라 길 닦아주는 역할임을 정확히 알고 예수님 오심을 기뻐하였다. 세상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이 아니면 불가능한 삶이요 자신의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정의내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삶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왜 항상 동역자가 있는 걸까....
예수님조차도 요한이라는 동역자의 앞섬이 필요하셨고 또 열두제자를 두었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 바울과 마가의 동역의 깨짐과 합침, 바울 서신에 나오는 수많은 동역자, 부르스길라와 아굴라의 부부의 동역.....

특별히 바울의 능력은 수많은 동역자의 능력이기도 한 거 같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던 그 수많은 동역자들이 아니었다면 유럽을 뒤집는 엄청난 선교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바울이 선교 여행에서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어답트해서 선교를 해내던 능력을 보면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헌신하여 동역을 이끌어내는 데에 타고난 능력과 열정이 있었던 거 같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바울 서신을 읽으면 다른 서신서들보다 마음의 울컥한 울림이 더해짐을 느끼게 된다. 바울은 20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서신서를 통하여 동역자를 만들어내고 있는거 같다. 말이 아닌 글의 능력이기도 하다. 물론 삶이 증거하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글이 될 수 없었겠지만....

동역자가 많은 삶은 그 만큼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합하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함과 비판도 많이 받았던 바울이지만 이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동역자를 창출해내는 바울의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인 거 같다. 

어쩌다 요한, 예수님의 동역으로 시작된 생각쫒기가 바울의 동역으로 오게 되었다. 동역의 화두, 내 생각에 갖혀서는 절대로 풀 수 없고 성령님으로 풀어야겠지...나의 바운더리를 제한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마음을 맡기면 내가 동역할 수 있는 영역도 커지고 넓어지며 풍성해지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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