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신앙 이야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신앙 이야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0년 4월 28일 화요일

기드온을 보며 abundant 와 excessive

기브온이 만든 금에봇. 
금송아지, 금에봇.... 사람들은 금을 숭배합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부를 취한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에봇을 만들었지만 금으로 만든 에봇은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우상이 됩니다.

기브온의 70명의 자식들...
아브라함은 1명, 이삭은 2명, 야곱은 12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야곱은 12아들을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서 얻었지만 큰 충돌없이 한 집안에서 살아갑니다. 요셉사건이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서로 화해하고 형제로 하나가됨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70명의 자식은 숫자적으론 분명 축복일텐데 위계질서를 세우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형제간의 반란과 다툼으로 번집니다.
과한것....에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금에봇도 과했고 70명의 자식도 자식 이름 다 외우기에도 넘 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abundant한 축복과 excessive 한 축복.
자가 격리하며 필수적인 일만 하며 지내다보니 그동안 
abundant한 축복이 있었고
그것을 excessive 하게 남용한 면도 있었음을 보게됩니다
abundant함을 excessive로 가게하지 않게 하는 감사와 절제와 지혜를 구합니다.

2018년 6월 4일 월요일

뇌색남 솔로몬의 부귀영화와 그 허무함

아이돌같이 음악적인 재능도 많았던 멋진 남자 다윗은 그 많은 전쟁을 치르고도  전장에서 죽지 않고 제 명대로 수를 누리다 평화로이 죽었고 솔로몬의 시대가 열립니다.

솔로몬의 왕위 계승도 순조럽지는 않았어요.
솔로몬을 맞서 왕위 계승을 노린 다윗의 넷째아들 아도니야가 완전 엄친아였죠. 용모 뛰어나고 아버지가 뭐라 잔소리할게 없었다고....그러니 사람들이 아도니야를 따르는데 심지어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 다윗의 최측근까지 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운자는 솔로몬.  결국 그 둘은 솔로몬에게 죽임 당하고 아도니야도 밧세바를 통해 다윗의 말년에 수종들던 미녀 아비삭을 자신에게 달라 구하다 죽습니다. 이건 율법에 어긋나는 요구였어요.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왕이 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거 같아요. 친모 밧새바가 아도니야의 율법에 맞지 않는 요구,  다윗의 여인 아비삭을 달라는 일을 허용하라고도 하였으니 지혜로운 판단력이 필요함을  경험으로 알았겠지요.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부와 명예등도 따라오는데 그게 율법을 따르면 형통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맥락인 것이 지혜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적용하면 되는 일이기에 율법대로 따르면 형통하리라는 구약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일맥상통하지요.

지혜롭던 솔로몬왕, 뇌색남이었던 솔로몬왕은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며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간과합니다.  수많은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는데 그들이 들고 들어온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함께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두나라로 분리되어 온전한 왕국을 이루지 못합니다.  남유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피를 잇는 르호보암 왕이 왕위를 차지하지만 이 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노역을 줄이라는 노인 신하의 충고를 무시하고 소년 친구들의 의견을 따라 솔로몬 왕궁을 짓느라 피폐해진 백성들을 더욱 쥐어짜면서 나라를 위기로 몰아갑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한계.  솔로몬은 지혜가 가져다준 부와 명예에 취하여 하나님 떠난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버린 어리석은 왕이 됩니다.

솔로몬 부분을 성경책에서 읽을 때마다 그 어마어마한 부의 향연에 놀라게 되는데 전국민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잇어던 절대 권력하에서 가능했던 부의 축척 노동력 착취..... 민주국가 구조인 오늘날에는 절대 못따라갈 부의 집중을 맘껏 누렸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하는 고백은 헛되고 헛되도다이지요.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거 같아요. 부와 명예 부럽고 갖고 싶은 것이지만 최고로 누렸던 솔로몬이 다 경험해보고  헛되고 헛되다하니 분명 채우면 채울수록 빈자리가 더커지고 공허한 허상을 쫒는 것이리라 믿게 되네요.





성경의 사실성

1.창조에 대하여: 우리가 요리를 해도 아무거나 넣고 우연의 조합으로 맛있는 음식이 탄생하지 않죠. 정교하게 재고 온도를 맞추고 노력을 들여도 유명세프같은 음식은 절대 못 만들자나요. 우주가 그리 우연으로 창조되었을까? 

2. 지구와 보석처럼 박힌 별들 좀 많이. 달. 그리고 태양. 이정도로도 인간에게는 충분한 우주일텐데 what a waste!! 왜 그리 우주는 무한하고 끝없고 광대하게 창조하신걸까.....
이 생각 거꾸로 보면 중심에 인간이 있어요.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으로 제한하는거죠.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광대하시고 무한하시고 엄청나시기에 그 무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펼쳐 보이시고 계시다. 이리 생각하면 무한 우주가 자원의 낭비로 보이지 않고 숨이 턱 막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성으로 보여요.

3. 소설 개미. 개미 사회에게 한 소년은 신이었죠. 이 작가는 우리가 신이라 믿는 것은 우리보다 뛰어난 영적인 세계를 알고ㅠ해석하고 우리를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실체. 개미에게 인간같은 그런 존재에 의해 조정당하는거라는 의문을 던지죠. 즉 외계인이 신이라는 걸 던지며 우리를 통제한다 그런 아이디어죠. 그런데 이런 지적 유희에는 사랑이 없어요. 우린 본능적으로 완전함 사랑 그런걸 원하지 않나요? 하나님만이 채울수 있는 그런 완전성에 대한 본능적 갈구 같은 거요.

4. 다빈치 코드의 도발....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정성을 쏟아 읽어보면 예수 사건은 누군가의 조작과 비밀을 감추려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 일들이 아니죠. .
근혜 명박 다 감추려던 진실 앞에 떨고 있는데요.
예수사건이 사기라면 지금쯤 밝혀져서 힘없이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할텐데  성령의 역사하심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온 지구를 덮고 있어요.

진실과 거짓.
뉴스에서 정치적인 공방전이야 내 삶의 질 정도를 담보하지만 성경이 진리이냐 라는 이 공방전은 내 삶, 영생과 죽음, 심판을 담보하고 있어요.
진지하게 탐구해봐야할 주제이지요.

아이돌 같았던 멋진 남자 다윗과 그의 하나님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읽어가다가 다윗이 등장하는 즈음에 이르면 놀라게 된다.
다윗전의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등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교류했던 것과는 한차원 달라지는 걸 본다.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고 모세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가르쳤던 사람이라면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법대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건지를 보여준다.
모세의 하나님은  위엄과 전능과 능력이라면 다윗의 하나님에게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신뢰와 친밀감이 느껴지고 그 교제의 깊이가 무척 깊어짐을 본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이 시대에 이렇게 깊을 수 있음이 놀랍다.
신령님께 빌던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신의대한 인식,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과 비교해보면 그 시대에 다윗이 이런 신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다윗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아버지같이 대화하고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친밀함이  표현되고 아버지의 법대로 신뢰하며 따르며 사는데..... 우상으로 만들어서 비나이다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윗을 보면 삶의 구비구비를 넘어갈때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려내려 무척 노력함을 본다. 마치 존경하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삶의 구비 1:골리앗 사건
넘나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스토리에도 이미 사자의 발톱에서 양을 지키며 하나님을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분노하며 골리앗과 맞설 용기를 냄을 본다.
사울이 거의 30년 가까이 확고부동한 왕을 하고 있었는데 10대 소년 다윗이 등장 골리앗을 쳐부시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아요 다윗은 만만이라 노래하며 다윗을 높이게 된다. 왕될때부터 자존감 낮았던 사울은 안절부절하며  다윗을 죽이려한다.
사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왕위를 보전하고 축복하리라 약속하시지만 사울은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신이 사람들,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가 너무나 중요했던 지라 그 생각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보다 앞서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다윗이 알고 있던 하나님을 사울은 잘 모르고 잘 따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음을 본다.

삶의 구비 2: 도피생활
다윗은 정신병자 같이 다윗을 좆는 사울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는데 이 와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두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칠 수 없다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던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이 엄청나다. 사울의 40년의 통치는 자식대에 이르지 못하고  끝나고 전쟁에서 죽게된다. 사울이 죽자 30세의 다윗은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되지만  사울을 따르는 잔여세력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전지역의 왕이 되는데는 7년이 걸린다.

삶의 구비3: 왕으로서의 통치
다윗은 40년간 통치하며 이스라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키고 번영을 누리며 전성시대를 이룬다.  가나안 정복기땅의 3배에 해당되는 땅을 정복하고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아람 시리아까지 다 정복하며 다른 나라에까지 하나님을 알린다.유대인들은 지금도 다윗의 별을 보며 이 시대를 그리워하고 회복되기를 바라는데 유대인들은 그에게서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모습에서 나타날 왕적 이상을 보았음이다.

 i.v.p 성경사전에 따른 다윗은
 ' 비록 불안전하였으나 그는 인간이 흠모할 만하고 건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행동가요 시인이며 부드러운 연인이고 관대한 적이며 엄격한 정의의 시행자였다' 
시와 음악에 능하고 용모도 출중했던 다윗은 어떤 아이돌보다도 더 매력적이다 할만하지 않을지.....

사사시대의 불신앙 가운데에서 어찌 다윗은 이런 신앙을 가질수 있었는지....다윗의 증조모 룻, 그리고 보아스가 다시 보이게 된다. 품성이 훌륭했던 보아스 룻을 통하여 내려온 하나님 사랑이 다윗에 이르러 꽃을 피운 듯하다. 어렸을 때 부터 신앙 안에서 키워져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양치기 소년 시절 부터 실제로 경험하면서 깊은 신앙인으로 자라났다.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마음이 시편을 통해 절절히 표현되었다.

삶의 구비5:밧새바 사건 이러한 다윗도 신앙적으로 넘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왕이 되어 승승 장구 하다보니 교만해져서 유부녀 밧새바를 범하는 사건이다. 밧새바의 남편을 살인 교사하기도 하니 간음과 살인 교사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윗의 왕권 말기는 사울과 크게 다르지않게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심지어 왕궁을 내어주고 쫒겨나 아들이냐 아비냐 둘중 하나가 죽어야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사울보다 심할 지경으로 민심도 얍살롬에게 돌아가고 어려운 상황인데 사울과 달랐던 점은 다윗은 자신의 잘못에대한 뉘우침이 깊이 있었다는것이다. 처음엔 자기의 죄를 의식조차 못했던 다윗이 깊게 뉘우치자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룰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신다. 실패의 댓가는 넘나 엄중하지만 그래도 다윗의 죄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우상 숭배의 죄는 아니었기에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나가는 그 약속은 지켜지고 이어지게 된다.

삶의 구비6:성전건축준비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하였다. 왕궁보다도 성전을 먼저 생각했던 다윗.
하나님이 아낌 없이 축복했던 다윗인데 다윗또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정성이 컸다. 이 상호작용.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표현이 성전 건축의 열망으로 나타났고 성전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성전 건축의 모든 준비 부분을 다윗이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린 왕이므로 실제 건축은 그 아들 솔로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말년은 태평성대인 나라. 모든 백성들이 각자 맡은바 자기 할 일을 하며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바로 선 지도자가 그 백성들을 다 살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
위기도 있었지만 신실하고 아름답게 이어져 가는 관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다윗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고 이러한 분이라면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다윗을 보면서 나도 다윗과 같이 아름답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고 싶어진다.

2018년 4월 7일 토요일

크리스 탐린 가스펠송 가수 공연

크리스 탐린은 유명한 크리스챤 송 라이터이자 가수인데요 2년에 한번씩 피츠버그에 공연 옵니다.

아이들은 유스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몇번 갔었는데 저희는 팝 콘서트 같은 그런 공연장 분위기, 시끄러운거,  그리고 파킹하고 찾아가는 수고 그런 것들이 선뜻 내키지 않았는데 가보신 어른 친구가 좋다고 같이 가자고 하여 믿고 가보았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음향 파워나 콘서트 오거나이즈 등은 팝콘서트 수준인데요 분위기는 크리스챤 콘서트라 지나치게 과열되는 분위기 아니고 조용한 송 할때는 앉아서, 또 화면과 말씀에 잠시 집중하는 시간도 있었고....뜨거운 찬양 부를때는 서서 손 올리고 발구르며 싱어롱하고 그러는 분위기....주변 둘러보니 연세 많으신 분들도 많더라구요. 그리고 가사를 화면 젤 위에 띄워 주어서 그게 일단 넘 좋았어요. 따라 부르기도 좋고 찬양 이해하기도 좋구요.

나오는 싱어들의 하트에도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깊이 있어서 최고의 악기연주와 음향 시설 가운데 그들의 찬양을 감동으로 듣기도 하다가 또 함께 따라 부르며 온 회중이 함께 찬양드리며 하나님을 높이는.... 그런 기대했던 힐링이 있더라구요.
크리스탐린 이외에도 유명한 싱어들 몇몇이 함께했는데 다들 색깔이 다르고....그도 좋았어요. 그래도 탐린의 노래에는 탁월함이 있었어요. 키가 작은 편이고 표정이 어린아이 같이 밝아서 살짝 늙은 해피한 엘프 같다고 울큰딸이 평했었는데....
이 분 40대인데 더 늙어서 공연 못하기 전에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이....


노래 스탈이 우리 같은 올드 패션 취향에 맞으면서도 사람 자체가 밝고 선해 보여서 좋더라구요. 사실 가보니 이 공연은 청소년이 아니라 중장년 어른을 타겟으로 하는 공연이더라구요. 관중도 그랬구요. 2년 후가 기다려지네요.


글고 아래 포스터의 킴 이라는 여자분 싱어. 가창력 끝내줬어요. 중저음이 좀 약한데 고음은 정말 파워풀. 안경쓴 남자분도 유명한 분. 노래 스탈 가사들이 좀더 지식인풍으로 달라요. 더 소형 콘서트에 어울릴거 같은....옆으로 사진 찍힌 흑인 혼혈 가수는 가성을 써서 부르구요. 스페인어로 부르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도 있었고.... 다들 색깔이 달라서 또 좋더라구요. 


2018년 4월 3일 화요일

하나님께 의존? 정보에 의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와 정보 알아보기, 이 두가지를 함께 해나가야하는 일에서 발란스를 맞추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기가 너무 쉬운 것을 경험한다.

정보에 치우치면 기도를 놓친 채 구글링의 연속으로 한참을 시간을 보내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난무하는 정보를 분별하는 힘을 잃어버린 채 그 정보에 매몰되어 허우적대면서 결국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쫒다가 폭망하게 되는 경험이 있었다. 
그 때 당시는 최선과 최고의 결정인 거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 잘못된 결정인 줄 알게 되더라는....

하나님의 인도에만 치우치면 정보를 찾는거 자체가 마치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인 양 터부시하며 하나님이 해주시겠지 하면서 내가 해야할 숙제를 미루고 있는 상태, 이건 진정한 인도가 아닌데 의외로 이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는 결과가 나오고 나서 내가 이걸 모르고 있어서 놓쳤구나 하면서 후회하게 되더라는....

성경에서 이런 치우침의 오류에 따지지 않으면서 가장 완벽한 행동지침을 주는 예는 가나안 정탐이었던 거 같다.

가나안을 이스라엘이 정복해야하고 정복 하게 하실거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들이 가나안땅을 정탐하기를 원하셨다. 정보 수집을 시키신거다. 정보수집을 결코 소홀히 여기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정보를 수집하러 다니며 같은 것을 보는데 정반대의 의견이 나온다. 
여기서 눈으로 보이는 정보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간에 차이가 나타난다. 
가나안 거민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다하고 하는 사람들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는 갈렙과 여호수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시각의 큰 차이인데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고 그것을 믿고 의지함이 삶으로서 증명되어 온 사람은 어떤 것을 볼때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그 비슷한 예가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 때가 아닐까.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양을 지켜내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을 때 거인 골리앗을 이길 방법을 알아냈고 그 방법은 물맷돌 5개 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인생을 살아오며 갖추게된 실력.
사자와 곰도 덩치크고 사나왔지만 무찌를 수 있었던, 하나님이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높이는 일을 스스로 하신다는 것을 경험한 자의 그 시각이 있었다. 

그러기에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칼에 맛서는 방법으로도 바른 정보 파악 능력을 갖고 갑옷을 벗고 칼이나 활이 아닌 물맷돌 5개를 준비한다. 사자도 곰도 쓰러졌다면 기골 장대한 거인도 쓰러뜨릴 수 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거인을 쓰러뜨리리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자신의 이름을 높임이 아닌 선한 동기에 충만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가나안의 거인들을 보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싸워 이기게할 그 무엇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고 그리 나아갈 때 가나안의 거인들이 그들의 밥이 되리라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정보를 모으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 다윗과 같은 믿음과 실력을 갖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수 있는 것. 현상 그 안의 깊숙히 숨어있는 실체를 보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이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의한 다음 단계는 세상 방법으로는 알수 없는 참으로 독특하고 허를 찌르는 그런 방법으로  완승하게 하시는거 같다.

그리고 막연하게 하나님이 해주시리라 믿는, 게으름을 신앙으로 핑게 삼으며 정보 수집도 않고 노력도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며 열심을 내되 한발짝 물러나서 정보나 세상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그것이 승리로 가는 바른 신앙인의 자세인 거 같다. 




2018년 2월 28일 수요일

50중반의 신앙생활

어렸을 땐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그걸 표출하고 추구해 나가는 스타일은 내면적으로, 속으로만 이었던 거 같긴하나 욕구 만큼은 컸던거 같다.
그러다 50중반에 접어들어,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더 짧다는 엄연한 현실을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다보니 이 세상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는 거 같다. 

정신없이 마음을 쏟게 되어 바쁜 일상을 살아가게 하던 아이들도 하나 둘 떠나고 슬슬 건강 또한 옛날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서 이제부터 어찌 살아가야하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지금부터 가장 극복하며 살아야하는 것은 삶의 허무가 아닐지....

죽으면 다 없어진다면 무얼 그리 열심히 가꾸며 키우며 살아가야하는 건지......




그래서인지 이 현세의 삶의 복, 그 복이 정신적인 풍성함, 인간관계의 풍성함, 물질적인 풍요이든간에, 현세의 삶에 초첨 맞춰졌던 나의 신앙 생활은 중요한 방향전환을 하는 거 같다. 순교가 발 붙일 수 없었던, 하나님 믿고 복받고 좋아요의 신앙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 죽음 이후의 천국에서의 삶으로의 여정에 더 관심이 가는 거 같다. 

구원과 천국에 대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게 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구원계획 어디엔가에 작은 점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되면서 때때로 그 역사하심이 내 삶 속에 있음을 경험하면 그것이 가장 큰 삶의 의미부여를 해주게 되는 거 같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교사로 가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에 대한 중독성이 세상 어느 것에 대한 중독보다도 헤어날 수 없다며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로 삶을 인도하시는 것이 느껴지면 그 걸 알아가는 그 맛이 정말 짜릿하고 좋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더욱 도즈를 높이게 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되나보다.

지금의 오십 중반의 끝을 바라보고 가는 삶에서는 이 세상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기쁨은 그 순간으로는 눈부시게 찬란하나 너무나 한시적이고 허무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함이 24시간인 천국으로의 삶을 이끌어주심을 느끼게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내 삶에 다시 의미 부여를 하게 되고 허무의 그림자가 발 붙이지 못하고 떠나감을 느낀다. 

최근에도 큰 딸의 진로 문제로 기도하면서 그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 가족의 삶이 들어가 있으며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의 라인업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로드맵 안에 들어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한 그 약속이 실현됨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이 참으로 기쁘다. 세상 어느 것보다 강한, 하나님의 중독성을 맛보아 알아가는 기쁨이다. 그걸 기대할 때 삶의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 거 같은 내 삶도 기대가 된다. 

2018년 2월 7일 수요일

에서와 야곱

성경의 에서와 야곱의 스토리를 제일 처음 들은 것은 한국에서 거의 반 강제로 교회를 몇 번 나갔었는데 그 때 주일 설교에서 들었었죠.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 단지 미디어와 학교에서 배운대로 4대 종교 중의 하나로 배웠고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기독교도 윤리 교과서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야곱이 장자권을 뺏기 위하여 엄마와 짜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설교를 듣고, 그리고 그런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요 이스라엘의 선조라는 설교 내용을 듣고는 이건 뭔가? 싶었었어요.



그후로도 아브라함, 이삭, 요셉, 다윗등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결점은 있었으나 마음을 울리고 신앙의 본이 됨을 배우고 느꼈지만 야곱에 대해서는 뭔가 좀 야비하면서 마땅치가 않은 느낌으로 보게 되더라구요.
처음 들었던 그 설교에서 에서는 하나님을 우습게 안 반면 야곱은 하나님을 꼭 붙들고 의지하는 존재로 해석을 해주었음에도 오랜동안의 도덕 관념이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올해의 성경 일독으로 창세기 진도를 나가면서는 그 야곱이 참 맘에 와 닿네요. 그 첫 설교를 들었던 나의 나이는 아마도 27세. 야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 나이만큼의 삶의 경륜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에서는 거부인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나요.
즉, 에서는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거죠. 사냥을 잘한걸로 봐서 기질도 활달하고 체격도 좋았던거 같아요. 고대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좋은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인물이 아니었을 까 싶어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네요. 그런데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필요 없었죠. 심각하게 인생을 고민하며 살 필요도 없었으니 가볍게 팥죽에 장자권도 팔고 이방여인과 결혼도 합니다. 이방여인들은 세상적인 아름다움에 목숨을 걸었을 터이니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는 등,  하나님을 아랑곳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반면 야곱은 약하고 조용해서 엄마의 일을 거드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악착 같은 면은 있었는지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을 택하는 대신 동생이었던 약한 이 아이를 축복하시겠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이삭은 노약해지고 장자권의 축복을 줄 때가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때 까지도 이삭의 에서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축복을 줄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이삭의 아내, 야곱의 엄마는 야곱을 이삭인 양 속임수를 써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는 계획을 세우고, 야곱은 장자의 축복,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아요. 

속이는 부분....이건 잘한건지 잘 모르겠어요. 성경에는 몇번씩 하나님의 법이 잘 계승되지 않을 때 윤리 도덕적으로는 잘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더라구요.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스토리도 그렇구요. 암튼 이부분, 예전처럼 야비하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걸로는 더이상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하나님 뜻에 맞는 바른 방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무튼 야곱은 엄청난 축복을 받아요.
창세기 27장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여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이후의 야곱의 삶.....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면서 시작된 20여년의 타향살이, 외삼촌 라반으로부터의 결혼사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 딸의 강간, 몰살의 위기 속에서 도망함, 자식들의 불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행방불명, 기근등 온갖 삶의 굴곡을 겪어요.

반면 에서의 삶은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올 만큼 여전히 부유한 아빠 옆에서 유복하게 보내고 야곱이 집으로 돌아와 에서와 야곱의 양떼가 동급으로 불어났을 때는 장자권 때문인지 야곱에게 아버지 땅을 주고 자신은 에돔땅으로 가지만 거기서 자손은 불어나고 큰 부족을 이룹니다. 큰 삶의 굴곡이 없고 오히려 야곱보다 편안한 삶을 산거 같아요.
우리가 바라는 삶이죠.

그렇다면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만 있어도 힘들었을 온갖 삶의 굴곡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간 야곱의 인생이 과연 복있는 인생인가? 그런 의문이 들지요.

그런데 야곱의 삶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했고 야곱의 삶의 스토리는 하나님의 스토리이기도 해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결국 이기고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 하늘나라에 까지 닿아있는 사닥다리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꿈 꾼 야곱.... 라반의 집에서 양치기를 할 때 양의 숫자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해주신 축복.....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큰 나라의 재상이 되어 기근에서 구해준 일.....성경 어느 인물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간증거리가 쌓인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야곱이 받은 축복은 그 후손이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를 만드시고 그 후손에서 예수님이 출생하시어 만민을 하나님 나라로 부르는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으로 이어지지요.

반면 에서의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간섭하지 않고 등장하지 않아요. 야곱의 삶의 스토리에는 야곱과 하나님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있는 반면 에서의 삶의 스토리엔 하나님이 없어요. 에서의 자손이 이룬 에돔 족속은 에서 당대에는 번성했을지 모르나 성경을 읽다보면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됨을 보게 되구요




이렇게 야곱의 삶을 들여다보니 복있는 삶은 현세의 삶의 잘나감에 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보네요. 어려움 많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함께함의 그 스토리가 많이 많이 쌓이는 삶이 축복의 삶이요 그 삶의 끝은 천국으로 이르는 사닥다리로 이어지겠구나 생각하게 되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스토리를 써가는데 동역하며 내 삶의 스토리가 그 안에서 자리매김하는 삶. 그것이 축복의 삶이라는 걸 알겠어요. 

야곱의 재발견.....
우리가 살다보면 이러 저러 겪는 힘든 일들....남들은 다 평안한거 같은데 나만 왜이리 힘든가 싶은 일들을 겪게 되어요. 하나님 앞에 가져간다면 그런 어려움이하나님께 의지하며 함께 하는 풍성한 간증거리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야곱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네요. 
이제 야곱은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도 내게 큰 울림을 주는 인물로 탈바꿈되네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고 그 아들들로 12지파를 이루게 되는 나라가 세워져가는 만큼의 큰 인물로, 건국의 시조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그 원리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하구요.
야곱처럼 하나님 붙들고 살아야지 생각도 하게 되구요.
현세의 삶에서 힘든 일 없고 평안하며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축복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역사의 한부분을 차지하며 자리매김하는 삶, 그것이 참된 축복의 삶이라는 것.....

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서서평을 보고싶다.

신앙생활 속에서 느끼는 거는 신앙 생활의 여러 모습이 있다는 거

1. 나의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의지하고 찾는 모습
2. 하나님의 일을 열심내다보면 은혜 주시어 내 일도 잘될거라 믿는 모습
3. 나의 성장과 행복과 더불어 남의 성장과 행복이 관심가져지고 열심을 내게 되는 모습
4. 나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전부인 모습




2,3,은 얼핏 비슷해 보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2번의 하나님일이 교회와 남을 위한 일이라 보이므로) 사실은 많이 다르고 차라리 1,2,가 더 닮은 모습인 거 같다.
내 힘의 한계를 느끼며 절대자를 의지하려니, 절대자의 맘에 들어야할 거 같아 나오는 행동이 2 인 그런 상태는 아직도 나의 행복과 성장, 나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삶이다. 

3은 삶의 중심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옮아가지기 시작하는 삶이다. 3이 된다면 참 행복한 삶일거 같다.
2에 있으면 감사할 일이 적으나 3,4에 있으면 남의 일이 다 내일로 감사할 일이 많을 거 같고 남의 조금의 성장과 행복이 다 내것인 양 기쁠것 같다. 
서서평의 선교사님은 그래서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영화를 보고 그 행복을 찾아보고 싶은데 어디서 볼 수 있을지....
예전에는 3,4의 삶은 참 많이 손해보는 삶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참 축복이 있는 삶이 3,4의 삶인거 같다. 정말 많이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인거 같다. 남이 더이상 남이 아니요, 하나가 되는 삶.
내가 커지고 넓어져서 남일이 내일 같아지고 못된 자애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삶.
예수님이 그러셨고...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런 삶.

그런데1, 2가 되어야 3,4가 될것도 같다. 1과 2 속에서 하나님을 많이 체험하다 보면 자연스레 3으로 흘러가게 이끄신다.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처음엔 본인들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즉 1,2를 경험하다보니 부르심에 응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많이 듣는다.   3이 아직 아니라고 스스로 낙심하거나 아니면 남을 보며 아직 2인데 3인양 한다며 정죄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되면 자연스레 3으로 넘어가지는 섭리가 있는 듯하다. 나의 일의 잘됨이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하나님께로 오는 것임을 알다보면 나를 중심 삼음이 참 부질 없다는 깨달음이 오고 그것이 자연스레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어느새 중심축을 옮기게 되는 거 같다. 그럴 때 참 많이 기쁜 삶을 살게 될거 같다.
하나님 안에서 내 기쁨이 남의 기쁨과 같이 가는 삶을 살다보면 4의 경지, 서서평의 경지에 이르는 거겠지. 

그런데 2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 머물면 참 오래 헤매게 되고 안 좋은 거 같다. 2는 잘못된 방향, 율법주의, 중심없는 열심으로 내 의를 세우고 남을 정죄등 잘못된 방향으로 갈 소지도 많은거 같다. 율법에 철저했으나 그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몰라보며 자아의 철옹성을 굳게 했던 바리새인들이 오랬동안 2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에서 3으로 가게 하는 키는 나를 벗어날 수 있느냐.......욥의 시험이 바로 그 시험이었던 거 같다. 사탄이 말하길 복을 주니 충성하는 거라고...복을 거두면 충성할지 보라고....그렇게 시련 가운데 옥석을 가리시면 버티기 어렵겠지만 보통은 축복 주시며 하나님 알게 하시고 그 중심축을 하나님에게로 자연스레 옮겨가시는 거 같다.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을 때 물고기 만선으로 잡게 하시고 직접 구워 먹이시고....그렇게 채워지는 하나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하게 되는 경지. 그 때에 비로소 나와 이웃,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경지가 아닐지....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은 아닐지....

리고 그 모든 것이 1에서 시작한다. 1이 정말 중요하고 2에는 오래 머물지 말고 3으로 4로 이어지는 삶을 산다면 진정한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예수님과 기적

오늘 요한 복음 6-8장을 읽다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과 신약 사이 긴 침묵의 시대를 지나며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던 것처럼 선지자가 나타나 기적을 행하며 나라를 잃고 흩어져 있던 그들을 이끌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만나의 기적은 구전되어 전해오는, 성전에서 두루마기를 펼쳐 모세오경을 읽을 때나 들을 수 잇는 것일 뿐 경험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던 침묵기가 400년이기에 아무 기적도 역사도 없던 시대를 살아가며 말로만 듣던 그런 기적을 행하며 그들을 이끌어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룬 후인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보다 못하다 생각한 거 같다. 하긴 오천명을 먹인 한번의 기적은 하늘에서 수십만명(수백만명이라고도 함)을 먹이는 만나가 뚝뚝 떨어지기를 매일매일인 기적과 비교해본다면 작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기적을 보여주시고 행하심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서 더 크게 더 스팩타클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니고 유대인들이 대단하게 여겼던 모세와 엘리아에 비하면 어찌 보면 소박한 기적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과 기적의 크기를 보고 메시아를 판단했더라면 예수님이 아니라 생각하는 오류도 범하였겠다는 생각이든다.

또 리더쉽 측면에서 보더라도 모세는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문자그래도 리드라며 방향을 제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가시고 들판, 바닷가, 산, 회당에서 말씀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그냥 그랬다. 세례 요한조차도 좀 헥갈려할만 하다. 

모세와 같은, 엘리아같은 메시아를 구하고 있었다면 정말 예수님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는, 더구나 그들보다 더 나은점을 찾기는 어려웠을 거 같기도하다. 
만나의 기적을  원하는 그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니 예수님을 바로 알고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시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며 말씀을 본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나 자기가 주인된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즉 보여주셔도 사람에 따라 못보앗다는 것인데 마음 중심을 어디에 두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지가 다시 보인다. 
구원, 메시아, 예수, 천국, 영생....신앙의 큰 줄거리들을 항상 놓치지말아야함을 다시 깨닫는다.

지상에서의 유대인의 나라 회복이 목표이라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볼수 없었을 것인데 그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천국 백성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을 아는 시각으로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 수 있엇을 것이다. 그의 젠들함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통하고 알아지는 그 축복을 직접보고도 놓친 사람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앞에서 만나의 기적을 말하던 사람들....만나가 가나안 땅으로의 천국 여정에 예수님의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것임을 어찌알았으리요....
기적은 그 큰 줄거리에서 필요할 땐 작은 형태로든 큰 형태로든 주시기도 하는거 일거 같다.  
지상에서의 우리 삶을 해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말 그대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 성경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더이상 뭐가 필요할까 싶다. 구원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위해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없는 것같다.
단지 그 구원을 이루어내는 세상 끝날이 오기까지의 여정에서는 때로 필요하면 기적을 사용하시기도 할 거 같다. 안 하실 이유도 없는 듯.... 그러나 세상의 만나를 원하는 인간이 이용하고 변질시킬수 있음을 아시기에 경계하실 듯.....

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동역,바울의 동역

세례요한의 탄생을 보니 보통 난세에 태어나는 영웅의 신화적 탄생 요소를 골고루 갖추었음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거룩한 집안, 제사장집에서 태어난다.
이 제사장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었는데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갖게 될거라 알려주고 수태를 하게 되고 이 때 제사장인 아버지는 말을 못하게 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가 말이 터지며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붙여준다.
뭔가 탄생부터가 대단한 인물이 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범상치가 않다.
주변 사람들도 기이히 여기며 요한의 삶을 눈여겨 보았을 법하다.
그런데 정말 요한은 먹는거며 입는거 생활하는 것이 남달랐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르게 광야에서 낙타가죽 옷을 입으며 석청을 먹으며 구도자,진리를 추구하는 자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 요한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그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며 따르는 제자가 생길 수 밖에.....

예수님의 탄생은 어떠한가?
처녀가 잉태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지만 은밀하게 진행이 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지극히 평범하게 자라나신다. 30세까지 다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고 마시고 어떤 영웅적이거나 비범한 요소도 없이 자라신다.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먹고 마신다고 비판할 정도로 금식과 금욕등의 생활과는 달리 어찌 보면 범인들과 다를바 없게 생활하신다. 그리고 요한 앞에 와서 세례를 받으신다. 위대한 인물인데 탄생 신화는 은밀했고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들만 실현하시며 별난 거 없이 30살까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영웅의 요소를 두루 갖춘 요한은 어찌보면 평범해보이는 예수님을 태중에서부터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고 자신의 맡겨진 사명이 예수님을 맞기위한 터닦기 작업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동역의 시작은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정확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서는 신부되신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신부됨을 기뻐하는 친구로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기뻐했다. 물론 옥에 갖혀서는 잠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제자를 보내 물어보는 흔들림과 확인절차를 거치는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영웅 같은, 구도자 같은 요한이 평범해보이는,  엄마와 같이 혼인잔치에나 참석하는 예수님의 길을 평평히 하고 길을 닦고 씨뿌리는 작업을 잘 감당하였다.




요한의 동역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해보인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요한이 난세를 이끌어갈 영웅으로 보여지는데, 그런데 요한은 그런 자신의 주목 받는 인생이 자신의 영웅됨을 위함이 아니라 길 닦아주는 역할임을 정확히 알고 예수님 오심을 기뻐하였다. 세상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이 아니면 불가능한 삶이요 자신의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정의내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삶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왜 항상 동역자가 있는 걸까....
예수님조차도 요한이라는 동역자의 앞섬이 필요하셨고 또 열두제자를 두었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 바울과 마가의 동역의 깨짐과 합침, 바울 서신에 나오는 수많은 동역자, 부르스길라와 아굴라의 부부의 동역.....

특별히 바울의 능력은 수많은 동역자의 능력이기도 한 거 같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던 그 수많은 동역자들이 아니었다면 유럽을 뒤집는 엄청난 선교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바울이 선교 여행에서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어답트해서 선교를 해내던 능력을 보면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헌신하여 동역을 이끌어내는 데에 타고난 능력과 열정이 있었던 거 같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바울 서신을 읽으면 다른 서신서들보다 마음의 울컥한 울림이 더해짐을 느끼게 된다. 바울은 20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서신서를 통하여 동역자를 만들어내고 있는거 같다. 말이 아닌 글의 능력이기도 하다. 물론 삶이 증거하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글이 될 수 없었겠지만....

동역자가 많은 삶은 그 만큼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합하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함과 비판도 많이 받았던 바울이지만 이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동역자를 창출해내는 바울의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인 거 같다. 

어쩌다 요한, 예수님의 동역으로 시작된 생각쫒기가 바울의 동역으로 오게 되었다. 동역의 화두, 내 생각에 갖혀서는 절대로 풀 수 없고 성령님으로 풀어야겠지...나의 바운더리를 제한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마음을 맡기면 내가 동역할 수 있는 영역도 커지고 넓어지며 풍성해지리라 생각해본다.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인가?

성경책을 읽다보면 유대인의 성경인 거 같은 걸림돌이 마음에 생긴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을 읽다가도 그런 생각이 든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메시아 예언에 어긋남이 없으신 분이고, 태어나심도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만삭의 몸으로 가시다가 태어나시고....유대인의 틀안에 계신 부분이 맘에 바더가 된다. 
인류의 구원자이신데 유대교의 계승이나 발전 완성된 형태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좀 그렇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왜 유대교를 먼저 주시고  기독교가 시작된 걸까? 아주 새롭게 인류 구원자로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하시면 안되었나?




그런데 가만 보면 유대인들이 가졌던 사고의 틀, 예수님을 거부했던 그들의 사고의 기작을 보면 비유대인이요, 이천년 세월이 지나 현대를 살고 있는 이 세대의 우리들이 자신의 우상에 갖혀 예수님께 반응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있다.
특히나 유대인들이 그들에게서 구원을 이루어낼 계승자가 나오리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오만에 빠져 실제 구원자이신 예수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죽이기까지 한 그 모습은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맘으로 죽이는 그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의 세월동안 단단하게 굳어져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의 가장 잘 비추어지는 거울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이 없게 느껴지는 유대인들의 그 종교의 틀. 그걸로 예수를 핍박하고 거부하는 모습.
하나님의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믿으며 교만하게 행동하며 결국은 자기 이익과 세상에서의 권세를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마다하지 않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들....그건 유대교의 오랜 뿌리속에 쌓인 교만이 있었기에 나온 행동들인데 그게 바로 날 잘 비춰주는 거울이구나......
교만에 찬 우리의 모습이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의 예수 죽임, 그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고 그 모습으로 가장 잘 설명되는 구나. 그래서 필요했구나.....
그보다 더 깊은 뜻도 많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내 맘은 좀 정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