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서서평을 보고싶다.

신앙생활 속에서 느끼는 거는 신앙 생활의 여러 모습이 있다는 거

1. 나의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의지하고 찾는 모습
2. 하나님의 일을 열심내다보면 은혜 주시어 내 일도 잘될거라 믿는 모습
3. 나의 성장과 행복과 더불어 남의 성장과 행복이 관심가져지고 열심을 내게 되는 모습
4. 나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전부인 모습




2,3,은 얼핏 비슷해 보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2번의 하나님일이 교회와 남을 위한 일이라 보이므로) 사실은 많이 다르고 차라리 1,2,가 더 닮은 모습인 거 같다.
내 힘의 한계를 느끼며 절대자를 의지하려니, 절대자의 맘에 들어야할 거 같아 나오는 행동이 2 인 그런 상태는 아직도 나의 행복과 성장, 나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삶이다. 

3은 삶의 중심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옮아가지기 시작하는 삶이다. 3이 된다면 참 행복한 삶일거 같다.
2에 있으면 감사할 일이 적으나 3,4에 있으면 남의 일이 다 내일로 감사할 일이 많을 거 같고 남의 조금의 성장과 행복이 다 내것인 양 기쁠것 같다. 
서서평의 선교사님은 그래서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영화를 보고 그 행복을 찾아보고 싶은데 어디서 볼 수 있을지....
예전에는 3,4의 삶은 참 많이 손해보는 삶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참 축복이 있는 삶이 3,4의 삶인거 같다. 정말 많이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인거 같다. 남이 더이상 남이 아니요, 하나가 되는 삶.
내가 커지고 넓어져서 남일이 내일 같아지고 못된 자애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삶.
예수님이 그러셨고...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런 삶.

그런데1, 2가 되어야 3,4가 될것도 같다. 1과 2 속에서 하나님을 많이 체험하다 보면 자연스레 3으로 흘러가게 이끄신다.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처음엔 본인들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즉 1,2를 경험하다보니 부르심에 응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많이 듣는다.   3이 아직 아니라고 스스로 낙심하거나 아니면 남을 보며 아직 2인데 3인양 한다며 정죄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되면 자연스레 3으로 넘어가지는 섭리가 있는 듯하다. 나의 일의 잘됨이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하나님께로 오는 것임을 알다보면 나를 중심 삼음이 참 부질 없다는 깨달음이 오고 그것이 자연스레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어느새 중심축을 옮기게 되는 거 같다. 그럴 때 참 많이 기쁜 삶을 살게 될거 같다.
하나님 안에서 내 기쁨이 남의 기쁨과 같이 가는 삶을 살다보면 4의 경지, 서서평의 경지에 이르는 거겠지. 

그런데 2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 머물면 참 오래 헤매게 되고 안 좋은 거 같다. 2는 잘못된 방향, 율법주의, 중심없는 열심으로 내 의를 세우고 남을 정죄등 잘못된 방향으로 갈 소지도 많은거 같다. 율법에 철저했으나 그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몰라보며 자아의 철옹성을 굳게 했던 바리새인들이 오랬동안 2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에서 3으로 가게 하는 키는 나를 벗어날 수 있느냐.......욥의 시험이 바로 그 시험이었던 거 같다. 사탄이 말하길 복을 주니 충성하는 거라고...복을 거두면 충성할지 보라고....그렇게 시련 가운데 옥석을 가리시면 버티기 어렵겠지만 보통은 축복 주시며 하나님 알게 하시고 그 중심축을 하나님에게로 자연스레 옮겨가시는 거 같다.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을 때 물고기 만선으로 잡게 하시고 직접 구워 먹이시고....그렇게 채워지는 하나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하게 되는 경지. 그 때에 비로소 나와 이웃,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경지가 아닐지....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은 아닐지....

리고 그 모든 것이 1에서 시작한다. 1이 정말 중요하고 2에는 오래 머물지 말고 3으로 4로 이어지는 삶을 산다면 진정한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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